미술계 소식

'3만 번 태움’의 미학…이길우, 향불로 그린 인간 군상

2025.06.18

인사동 선화랑서 4년 만의 개인전

오방색 한지 색지 콜라주 눈길

'All kinds of things' 신작 35점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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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우, All kinds of things025-6 2025 91x130cm Incense, Mixed media on hanji paper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뽕뽕뽕. 향불로 태운 흔적, 오방색으로 이어붙인 조각보, 얼키고설킨 인간 군상.

향불화가 이길우(56·중앙대 교수)의 회화는 '태움'과 '겹침'의 언어로 인간 존재를 말한다.

4년 만에 선보이는 개인전 'All kinds of things'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21일부터 열린다.

이번 전시는 인간 존재의 양면성과 복잡한 관계망을 주제로 삼아 회화, 드로잉, 향불 작업 등 총 35여 점의 신작을 소개한다.

다양한 동세의 인물 형상이 겹겹이 포개진 화면은 사회 속 군상이 얼킨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인다. 18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 작업을 “사랑인지 증오인지, 행복인지 불행인지조차도 모호한 '삶의 덩어리'”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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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미술전문기자]18일 선화랑에서 이길우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전시 제목 ‘All kinds of things’는 '세상의 모든 일들, 살아가는 모습'을 뜻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속 민간인의 희생을 보며 인간의 본성과 잔혹함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꼈다”는 작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존엄성과 가치를 어떻게 잃어가고 있는지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표 시리즈인 ‘All kinds of things’는 불분명한 국적과 연령대의 군중이 한 화면에 서 있는 비구상적 장면이다.

인간의 다양성은 오방색으로, 관계성은 조각보의 패치워크에서 착안해 시각화됐다. 향불 작업으로 형상이 새겨진 순지 전면과, 오방색으로 채운 후면 장지를 배접한 이중 구조는 인간관계의 아이러니와 중첩된 감정을 담아낸다.

“가장으로서, 또 작가로서 삶의 무게를 느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업에 몰입합니다. 저는 제 경험과 삶의 태도를 작품 안에 녹여냅니다. 그렇게 보면 삶은 하나의 ‘덩어리’입니다. 행복과 불행, 사랑과 증오가 얽히고설켜 있죠. 결국 전시장 속 군상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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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차이1 2024 62x73cm Incense, Mixed media on hanji paper *재판매 및 DB 금지

향불로 구멍 낸 순지 위에 인간 군상을 그리는 이길우의 작업은 지난 20여 년간 독자적인 궤적을 그려왔다.

2003년, 가을 햇살 아래 타들어가는 은행잎을 보며 시작된 그의 향불 회화는 단순한 기법을 넘어선 수행이자 철학이다.
중국 배우 판빙빙 초상화를 제작하면서 화제가 됐고, 이후 사우디 알리드 왕자가 초상화를 의뢰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배우 이정현 집 거실 그림으로 대중에 알려지기도 했다.

한 작품당 평균 3만 번 향을 태우며 완성되는 노동집약적 회화는 ‘사라짐의 미학’을 보여준다.

“하나의 밑그림을 향으로 태우고, 그 흔적을 또 다른 이미지와 배접해 재구성합니다. 단일한 회화가 아니라 다층적 서사, 철학적 구조로 나아가는 거죠.”

그의 삶 또한 작업 안에 스며 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삶에서 향불의 이미지를 떠올렸고, 버려졌지만 날려고 보이는 종이조각에서 ‘욕망과 결핍’이라는 인간 본성을 포착했다.

“작업에는 인내와 고통이 전제돼야 합니다. 향은 타면서 스스로를 소멸시키지만 그 향기로 세상을 이롭게 하죠. 어머니가 그런 분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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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의 관객 2025 92x130 cm Incense, Mixed media on hanji paper *재판매 및 DB 금지


형식과 색 역시 치밀하게 구성됐다. 작가는 손수 칠한 한지 색지를 만들고, 잘라 붙여 콜라주했다.

밝고 경쾌하고 흥취가 있는 작품은 한국화 전통의 오방색 덕분이다. “그 중 황색, 노란색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 감정을 상징하는 색이기 때문입니다."

작품 'All kinds of things025-6'(2025)은 겹겹이 중첩된 인물 형상이 화면을 가득 메우며 인간 군상의 정체성, 그 불완전성과 공허함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 같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무수히 흩어진 점과 향불의 흔적들로 이루어진 구성은 존재란 결국 비어 있음의 집합체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한24-1’은 더욱 추상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방향성 없이 뒤섞인 곡선과 점묘는 감정과 관계의 유동성, 불확실한 정체성을 상징한다.

향불 작업 외에도, 색지를 잘라 붙이는 콜라주 기법은 형태와 감정을 동시에 구축한다. '여행자', '다른 시선의 관객', '이웃사람' 등의 연작에서는 절제된 동세 속에도 역동성이 살아 있으며 현대인의 상실감과 소망, 관계의 균열이 함께 드러난다.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단순한 조형 실험이 아니다. 그것은 점과 향불, 색의 겹침을 통해 사람이 사람 안에 엉켜 살아가는 방식, 존엄성과 상처가 공존하는 군상의 풍경을 그려내는 일이다.
 
“작가는 늘 새로움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는 “경험과 방향에 따라 언제든 형식은 변할 수 있다”며 ‘관객’, ‘여행자’ 시리즈에 이어 주파수를 모티브로 한 새로운 작업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저는 화가가 아니라 창작자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창작자는 끊임없이 변해야 하죠. 변화하지 않는 작가는 생명력을 잃습니다.” 전시는 7월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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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_인연2 2024 73x92 cm Incense, Mixed media on hanji paper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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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1 2025 125x180cm Incense, Mixed media on hanji paper (1)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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