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AI도 흉내 못 낸 ‘손의 기억’…정현, 재료로 빚은 인간의 초상

2025.10.21

PKM갤러리, 서베이 전시…조각·드로잉 84점

불탄 나무와 수표교의 돌 인간 형상 교차

조각 인생 50년, ‘그의 겹쳐진 순간들'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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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21일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개인전 연 정 현 작가가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2025.10.21.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제 조각의 기본은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사람 이야기를 하려면 결국 사람 형상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어요.”

조각가 정현(69)은 여전히 손으로 시간과 감정을 쌓는다.

21일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 ‘그의 겹쳐진 순간들(The Cumulative Burst)’은 축적된 시간과 '견딤의 미학'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지난 30여 년 예술 궤적과 새로운 전환을 보여주는 서베이 전시로, 1991년부터 2025년에 걸쳐 제작된 조각과 드로잉 총 84점이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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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M갤러리 정현 개인전 전시 전경. 사진=PKM갤러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인간의 형상에서 재료의 존재로
'50년 조각 인생' 정현의 작업은 인간의 모습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90년대 그는 삽과 목재 블록으로 점토를 내리쳐 인상적인 구상 조각을 만들었고, 물질적 이해와 표현 형태 사이의 균형을 이루었다.

이후 그는 세월과 기억이 스며든 침목, 철근, 숯으로 눈을 돌렸고, 재료 자체에 내재한 시간의 층위를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조각은 드로잉처럼 즉발적으로 던지는 게 아니라 붙이고 깎고 다시 묻히고, 또 마음에 안 들면 깎아내는 증축의 과정이에요.”

특히 그에게 재료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증거다.

“침목은 말없이 소멸해버리는 사람들, 그들의 시련이 깃든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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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정현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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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M갤러리 정현 개인전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회귀와 확장…인간의 본질을 향한 두상
“사실적으로 하면 사실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제 감정에 맞는 도구를 찾았죠. 삽, 도끼, 나무조각 같은 것들로 툭툭 치고 던집니다.”

이번 전시는 정현이 자신의 실천의 출발점이었던 구상 조각으로 회귀하는 자리이자, 새로운 국면으로의 확장을 보여준다.

개인전 제목은 ‘그의 겹쳐진 순간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새로운 두상 시리즈는 인간의 얼굴을 최소한의 표면으로 단순화해 근원적 존재를 불러낸다.

산불로 그을린 목재와 3D 스캔으로 재구성된 수표교 주춧돌은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에서 생생히 살아나며, 콜타르 드로잉은 전시장에 강렬한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인류의 다양한 얼굴을 마주하게 하는 이번 전시는 팬데믹·전쟁·기후위기로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과 가치를 다시 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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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M갤러리 정현 개인전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화장(火粧)’ 불탄 산에서 태어난 조각
정현의 최근 시리즈는 2019년 강원도 산불의 참화를 목격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시속 100km의 바람에 불이 번지고, 강릉과 양양까지 다 타버렸어요. 그 참혹한 현장을 스케치하고, 탄 나무들을 작업실로 옮겨왔습니다.”

그는 불탄 나무를 다시 고열로 태웠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잖아요. 저도 그 탄 나무를 다시 태웠어요. 그러면 표면이 벗겨지고 안쪽에 아름다운 무늬가 드러나요. 그래서 저는 그걸 ‘화장(火粧)’이라고 불러요.”

죽음을 정화하고 생을 불러내는 조각. 그의 백색 시리즈는 결국 ‘한국의 돌로 만든 부활의 조각’이다.

“이번엔 하얗게 칠했습니다.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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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Hyun, Untitled, 2025 *재판매 및 DB 금지


◆조각, 시장에서도 ‘명상적 존재감’
정현은 지난해 PKM갤러리와 전속계약을 맺은 이후 마이애미 아트페어와 프리즈서울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조각 인생 50년. 거칠고 투박한 물성 속에 인간 존재의 무게를 담아내며 묘한 명상의 기운을 전했다.

이번 전시는 새로운 두상 시리즈를 비롯해 대규모 야외 설치물, 수표교 초석에서 영감을 받은 모형, 목탄 조각과 콜타르 드로잉 등으로 구성된다.

이 작품들은 작가의 오랜 궤적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조각 세계가 새로운 장으로 도약하고 있음을 알린다.

“재료가 뿜어내는 힘이 있어요. 그걸 어떻게 파악하느냐,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저는 그저 그것을 살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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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M갤러리, 3D프린터로 제작한 수표교 다리 조각 작품. *재판매 및 DB 금지


◆기술 이후의 조각 '손의 감정'
정현에게 기술은 목적이 아닌 도구다.

“3D를 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그렇게밖에 안 되니까 한 거죠. 새로운 도구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한 거지, 기술을 따라가려는 압박감은 없었어요.”

AI가 그릴 수 없는 것은 감정의 순수성이다. 그에게 조각은 ‘형태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감정을 남기는 일이다.

야외 정원에 설치된 신작 대형 조각은 청계천 수표교의 교각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수표교는 조선시대에 수량(水量)을 측정하기 위해 청계천에 세워졌으나, 하천의 복개와 복원을 거치며 현재는 장충단공원에 일부 잔존하고 있다.

작가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수표교의 하단 교각에 주목했다. 별다른 기교 없이 무심하게 다듬어진 돌의 표면에서
‘세월을 견딘, 가장 한국적인 미감’을 포착하고, 이를 3D 스캔과 알루미늄 조형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기계가 복원한 시간의 단면을 다시 손으로 다듬는 일, 그것은 기술의 시대에 조각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묻는 행위다.

“AI가 다 할 수 있어도, 조각만은 못 해요. 감정의 순수성은 데이터베이스로 남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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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M갤러리 정현 개인전 전시 전경. 콜타르로 그린 드로잉과 청동 조각이 함께 선보인다.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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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타르로 그린 드로잉. CHUNG, Hyun, Untitled, 2025 *재판매 및 DB 금지


◆찌꺼기, 감정, 그리고 존중
“드로잉은 제 감정이 가장 먼저 드러나는 방식이에요. 첫 감정들이 가진 실수나 거칠음 속에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현은 콜타르(석유 정제의 마지막 찌꺼기)로 그린 드로잉을 선보인다. 드로잉을 ‘결정된 형태 이전의 생명체’로 본다. 즉흥적이고 미완의 순간이 오히려 작품의 생동을 만든다고 강조했다.

“콜타르는 석유의 마지막 찌꺼기예요. 쓸모없어진 물질에서 느껴지는 깊은 감정이 좋아요. 빗자루나 나뭇가지를 붓처럼 씁니다.”

그는 거친 붓질과 폐기된 재료 속에서 인간 존재의 잔여 감정을 포착한다.

“침목의 단순구조를 통해 질감만을 찾는 것처럼, 재료 자체의 아우라를 존중해왔습니다.”

그의 조각은 형태가 아니라 감정의 잔류물이다.

“조각은 붙이고 깎고, 다시 묻히는 일이다.”

정현은 여전히 손으로 시간과 감정을 쌓는다. 전시는 12월 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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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1991년 제작한 조각작품. 무릎을 꿇고 고뇌하는 뼈만 남은 인간의 형상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재판매 및 DB 금지

◆조각가 정현은?
홍익대학교와 같은 대학원 조소과에서 수학하고, 이후 프랑스로 유학하여 1990년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92년 원화랑에서의 첫 개인전을시작으로 2001년 금호미술관 '정현',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2006: 정현', 2016년 프랑스 파리 IBU 갤러리, 팔레 루아얄 정원, 생-클루 국립공원 '서 있는 사람', 2018년 금호미술관 '정현', 2022년 성북구립미술관 '시간의 초상: 정현', 2023년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덩어리', 2024년 제7회 창원조각비엔날레, 아트바젤 마이애미 비치(Art Basel Miami Beach) 출품 등 최근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24년 김복진미술상, 2014년 김세중조각상,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등 주요 기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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