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단색화 거장’ 박서보, 자서전과 그래픽 노블로 다시 만난다
2025.09.24
박서보재단, 이탈리아 출판사 스키라 협업
한국어·영어판으로 동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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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화 거장' 박서보 자서전 '박서보의 말'과 그래픽 노블 '박서보'가 출간됐다.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단색화의 거장’ 故 박서보(1931~2023)의 삶과 예술을 담은 두 권의 책이 전 세계 동시 발매됐다.
박서보재단(이사장 박승호)은 자서전 ‘박서보의 말’과 그래픽 노블 ‘박서보’를 내놓으며 "거장의 기록을 가족과 동시대의 눈으로 다시 엮어냈다"고 밝혔다.
이번 출간은 이탈리아 출판사 스키라(SKIRA)와 협업해 한국어·영어판으로 동시에 선보인다.
자서전 ‘박서보의 말’은 작가가 1980년대 초반까지 집필해둔 원고를 아들 박승호 이사장이 보강·편집했다. 그래픽 노블 ‘박서보’는 과학 그래픽 노블 작가 조진호가 집필을 맡아, 어린 시절부터 2023년 마지막 순간까지 파노라마처럼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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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24일 박서보재단 박승호 이사장이 자서전 출간 간담회를 열고 인사말을 하고 있다.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
24일 서울 연희동 박서보재단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박승호 이사장은 "속이 시원하다. 이번 책을 아버지 제사상에 놓아드리겠다"며 남다른 감회를 전했다.
그는 "작년 가을, 베니스비엔날레가 끝나던 즈음 아버지가 남기신 자서전을 어떻게든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과장된 영웅담이 아니라 가족의 눈으로 본 한 사람 박서보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히 만화로 나온 그래픽 노블에 대해 "전문가 시각이 많은 자서전과 달리 예술과 전혀 연이 없던 조진호 작가의 시선이 오히려 날 것 그대로의 박서보를 담기에 적합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소개했다.
책 속 박서보는 추상회화의 거장이기 전에, 한 여자를 사랑한 남편이자 세 아이를 키운 아버지, 괴팍했지만 끝내 더 나누려 했던 평범한 교사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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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박서보재단에 전시되어 있는 묘법 작품을 이유진 이사가 설명하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
'묘법(描法, Ecriture)대가'인 박 화백의 ‘연필 묘법’은 이사장인 박승호에게서 비롯됐다. 박 화백은 생전에 ‘둘째 아들이 노트 네모 칸 밖으로 글씨를 삐져나가게 쓰자 화가 나서 빗금을 긋더라. 그걸 보고 체념이라 생각해 그림으로 옮겼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연필 묘법’은 후기 묘법까지 이어지며 단색화의 정점에 올랐다.
이번 책 출간은 가족의 반응도 각별하다. 박서보 며느리인 재단 김영림 대표는 "어머니께 책을 드렸더니 아버지가 참 좋아하시겠다며 깔끔하게 잘 됐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재단은 "현재 박서보 아카이브 디지털화를 마무리 중으로 전작 도록을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4000여점 넘게 DB화를 했고 경매 등 재단에서도 모르게 나오는 작품을 찾아 소장 목록을 정리하고 있다.
생전 박서보 화백은 ‘기록의 대가’였다. 모든 작품에 일련번호를 적어 꼼꼼히 관리했고, 지금 재단 수장고에 책처럼 빼곡히 꽂힌 작품들마다 작은 숫자 이름표가 달려 있다. 작품이 아니라 마치 도록 한 권 한 권을 넘기듯, 그의 삶 전체가 기록의 연속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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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24일 박서보재단이 지하에 있는 작품 수장고를 언론에 공개했다.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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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24일 박서보재단이 지하에 있는 작품 수장고를 언론에 공개했다. 3D로 만든 박서보 화백이 앉아 있어 깜짝 놀라게 한다. *재판매 및 DB 금지 |
박서보미술관 건립도 속도를 내고 있다. 박서보재단은 연희동 재단 옆 부지에 ‘박서보미술관 서울’(지하 2층·지상 3층 규모)을 개관할 예정이다.
박승호 이사장은 “3년간 멈춰 있던 제주 JW메리어트 리조트 내 박서보미술관도 내년 준공을 목표로 다시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앞으로 박서보미술관 서울은 박서보뿐 아니라 후속 세대 작가들의 연구와 전시를 꾸준히 이어가는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생전 ‘단색화 거장’으로 추앙받으며 ‘행복한 화가’로 불렸던 박서보는 2023년 10월 14일, 향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창작 의지를 놓지 않았다. 그는 며느리에게 “배접해라, 나가면 작업할 게 너무 많다”고 당부했는데, 그 말이 끝내 마지막 유언이 됐다.
재단에 따르면 박 화백이 배접해두라고 남긴 캔버스 300여 점 가운데 50여 점은 그의 최후 작업으로 남았고, 나머지는 후대 화가들이 이어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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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박서보재단에 있는 박서보 전신상. 권오상 작가 작품이다. *재판매 및 DB 금지 |
책 ‘박서보의 말’ 첫머리에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울림이 담겨 있다.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하면 또한 추락한다. 내일모레면 아흔이지만 그래도 변해야 한다. 앉아서 추락할 수는 없다.’
생의 끝까지 변화를 선택한 예술가. 이번 두 권의 책은 그 치열한 기록이자, 한국 현대미술사에 남을 박서보의 또 다른 얼굴이다.
두 권 한 세트로 엮인 책은 26일부터 국내 주요 서점과 전 세계 미술 전문 서점, 온라인 플랫폼에서 동시 판매된다.
한편 박서보재단은 그간 국내에 공개되지 않았던 말년 작업 ‘신문지 묘법’ 연작등을 재단 전시장에서 선보이고 있다. 재단 투어는 매주 수요일 오후 2시(매월 마지막 주는 오후 7시) 진행된다. 홈페이지 예약 후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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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서보 기지재단 건물 전경. |
◆박서보재단은
2019년 예술가 박서보의 재원으로 세워진 비영리재단법인이다. 재단은 박서보가 남긴 작품과 그의 컬렉션을 보존·관리하고, 박서보와 한국근현대예술에 대한 자료를 아카이빙하여 체계화하고 연구한다. 박서보의 예술 정신을 잇는 전시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한편 다음 세대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한다. 2026년에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새로운 전시 공간을 개관하고 국내외 기관들과 협력하여 박서보와 그 외 다양한 작가들의 예술을 세계에 소개하고 대중 및 전문가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우리의 예술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향유될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박서보의 뜻을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