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빈센트를 위해', 고흐를 위해…요하나 봉어르 이야기
2025.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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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를 위해(아트북스) *재판매 및 DB 금지 |
빈센트 반 고흐. 예술사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는 이름 중 하나다. 그러나 그 뒤엔 또 하나의 ‘빈센트’가 있었다. 그의 조카이자, ‘빈센트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여성, 요하나 봉어르(요 반 고흐 봉어르)가 지킨 이름이다.
이 책 '빈센트를 위해'(반 고흐 재단 엮음, 아트북스)는 요의 삶을 통해 반 고흐 신화의 숨은 기반을 새롭게 조명한다.
하숙집 주인이자 영어 교사, 전시 기획자, 번역가, 그리고 여성운동가였던 그녀는 남편 테오와 형 빈센트가 남긴 예술적 유산을 오롯이 자신의 사명으로 껴안았고, 이를 세상에 알리는 데 남은 인생을 걸었다.
그녀의 시작은 평범했다. 문학과 예술을 중시하는 암스테르담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요는 1883년 런던으로 건너가 영국박물관 열람실에서 셸리 등 낭만주의 시인을 공부하며 상급 영어 시험을 준비했다. 다이어리에는 영어로 쓴 일상 기록들이 빼곡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인생은 예기치 않은 연결고리를 만든다. 1888년, 요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음을 이미 아는 것 같다’고 말하던 테오 반 고흐와 결국 결혼했고, 이 결혼은 단순한 동반자가 아닌 ‘빈센트 신화의 기획자’를 탄생시킨 운명이 되었다.
1890년 빈센트의 자살, 그리고 불과 6개월 뒤 테오의 사망. 28세의 젊은 미망인에게 남겨진 건 갓난아기, 수백 점의 그림, 수백 통의 편지,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상실감이었다. 하지만 요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슬픔을, “내가 그를 돕기는커녕 좋아하는 무언가를 빼앗는 셈이라면 정말 슬플 것”이라는 다짐으로 바꾸었다. 사랑했던 두 빈센트(남편과 화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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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를 위해 아트북스 카드리뷰 *재판매 및 DB 금지 |
요는 네덜란드 뷔쉼에 하숙집을 차리고 생계를 꾸려가는 틈틈이, 작품 보관과 전시 기획, 편지 번역과 편찬에 나섰다.
당시 그녀의 집을 찾은 작곡가 알폰스 디펜브록은 “집 전체가 빈센트 작품으로 가득했다”고 회상한다. 이 그림들이 훗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세계적인 명소, 반 고흐 미술관의 핵심 소장품이 된다는 사실은 당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오늘날 수백만 명이 찾는 이 미술관의 출발점이 뷔쉼의 다락방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05년, 그녀가 기획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전시는 대중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반 고흐의 세계적 명성은 그 지점에서 본격화된다. 이후 독일, 런던, 파리 등지에서의 전시와 작품 대여, 출판 활동이 이어졌으며, 결정적으로 반 고흐 형제의 서간집을 영어·독일어로 번역해 출간함으로써 전 세계 독자들에게 화가의 내면을 생생히 전달했다. 번역 작업은 그녀가 파킨슨병으로 펜을 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요는 단순한 예술 유산의 관리자 그 이상이었다. 그는 미술은 "관람객이 완성해야 하는 것"이라는 테오의 말을 곱씹으며, 그림 너머 사람들의 ‘영혼에 다가가는 예술’을 확신했다. 그녀는 반 고흐의 미적 언어가 단지 회화 기술을 넘어선, 고통과 서정의 본질임을 믿었고, 그런 신념으로 작품을 보존하고 퍼뜨렸다. 동시에 사회민주노동당(SDAP) 활동을 통해 여성운동에 참여하며, 남성 중심의 사회 질서에 조용한 도전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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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를 위해 아트북스 카드리뷰 *재판매 및 DB 금지 |
책의 제목인 '빈센트를 위해'는 두 명의 빈센트를 위한 선택이었다. 조카와 화가. 그러나 그것은 테오를 향한, 깊고도 뜨거운 헌사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그녀는 영웅적으로 임무를 완수했고, 그 과정을 통해 지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그녀의 아들이자 또 한 명의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2세는 어머니의 뜻을 이어 받아 재단을 설립하고, 마침내 오늘날의 반 고흐 미술관을 탄생시킨다.
‘반 고흐 미술관’이라는 눈부신 기념비는 사실, 요하나 봉어르라는 단단하고 조용한 지지대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녀의 존재가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의 빈센트를 만나지 못했을지 모른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