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대법원 조각’ 엄태정, 87세에 말하다…“조각은 세계를 건립하는 일”
2025.06.18
13번째 개인전 '세계는 세계화한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서 개막
알루미늄 대형 신작 조각·회화, 드로잉까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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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17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세계는 세계화한다' 개인전을 연 엄태정 조각가가 알루미늄 대형 시작 '낯선자의 은신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2025.06.17. [email protected]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예술(조각)이 세워지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장소 위에 건립하는 것이다.”
조각가 엄태정(87·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의 13번째 개인전 '세계는 세계화한다'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18일 개막한다.
1970년대 대표작부터 신작 조각, 회화, 드로잉까지 총 27점이 소개되는 이번 전시는, 조각이라는 매체를 통해 존재와 세계를 탐구해온 작가의 철학적 사유를 집약한다. 전시 제목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개념에서 따왔다. 세계는 단일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간과 사물, 장소와 시간이 관계를 맺으며 드러나는 ‘살아 있는 장’이라는 사유다.
그는 ‘법과 정의의 상(象)’(1995)으로 대표되는 대법원 정문 조각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7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조각가로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라며 “대법원이라는 물리적 건물이 완성된 이후, 그 상징성과 정신성을 조각이 부여했다”고 회고했다.
“대법원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제 작품이 바로 그것입니다. 조각이 세워지면서 예술성과 상징성이 더해졌고, 법의 공간에 신성한 영혼 같은 정신을 부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조각이 세계를 세우는 일이죠.”
"세계를 건립하고 대지를 내세우는 조각 작품은 투쟁의 격돌이며 이러한 투쟁 속에서 존재자 전체의 비은폐성이 -즉 진리가- 쟁취된다. ‘진리가 일어나는 방식들 가운데 하나가 작품의 작품 존재다’"(조각가 엄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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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엄태정 개인전 '세계는 세계화한다' 전시 전경. 2025.06.17. [email protect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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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정, 낯선자의 은신처 티틴의 은빛 베일-철인은 하늘을 걷는다, 2025, Aluminum, 92x88x350(h)cm (2) (1) *재판매 및 DB 금지 |
철, 구리, 청동, 알루미늄 등 다양한 금속을 다뤄온 그는 “쇠의 물성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있다"며 "그 안에서의 변화, 열기, 섬광, 밀도는 창작의 충동을 일으킨다”고 했다. 1969년 데뷔 이래 40여 년간 서울대학교 조소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평균 5년 주기로 개인전을 열어왔다.
이번 전시는 1970~80년대 구리 조각부터 최근의 알루미늄, 회화, 드로잉까지 이어지며 조형 언어의 변주를 보여준다. "작가의 세계는 늘 진보 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갈 순 없다. 신작과 구작이 어우러진 이번 전시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를 이은 고정된 형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구조’로의 현재 진행형 작업이다."
엄태정은 1960년대 초부터 조각의 형태와 재료에 관한 지속적인 탐구를 이어왔다. 초기에는 동양적 자연관에 기반한 추상 조각을 선보였다. 1970년대 중반에는 철에서 구리로 재료를 전환하면서 조형 언어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90년대에는 조각의 공간성을 보다 심화시켰고, 2000년대 이후에는 조용하고 시적인 미학을 추구하며 알루미늄을 주요 재료로 삼았다.
"금속(알루미늄)은 번쩍이는 광채에 이르게 되고, 색채는 빛남에 소리 울림에, 그리고 낱말은 말함에 이르게 된다. 알루미늄의 유연한 물질성의 광채 속으로 색채의 빛남과 어둠 속으로 소리의 울림 속으로, 낱말의 명명력 속으로 되돌아가(거기에) 자기를 내세울 때, 이 모든 것이 나타난다."(조각가 엄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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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정, 객정-춤 Sojourner-Dance, 2014, Copper, 76x45x74(h)cm *재판매 및 DB 금지 |
그의 작업에는 동양철학, 우주론, 자연관이 깊게 스며 있다. 티벳 불교, 이태백의 객정(客情), 철학자 한병철의 관조적 사유까지, 세계를 바라보는 다층적인 관점이 조각에 투영됐다.
특히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나의 아버지”로 칭하며 정신적 계보를 잇고 있다. 네 차례에 걸쳐 브랑쿠시 고향을 방문했고, 수도원 수행과 불심의 전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브랑쿠시는 동양적 사유와 신비, 수행적 예술의 정신을 품은 인물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객정’ 시리즈처럼 유목적 존재로서의 조각도 등장한다. “객정이란, 우주 전체가 손님이라는 뜻입니다. 태양도, 달도, 모두 스쳐 가는 존재죠. 객정은 이태백의 시 제목으로 나이 드니 이 말이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작품 '1000개의 찬란한–막고굴 시대'는 불교적 세계관과 동양적 시간성, 신성과 역사, 수행이 교차하는 장소성을 품는다. 막고굴, 바미얀, 석굴암으로 이어지는 조각의 영적 계보를 암시하며, 조각을 자비와 구원의 공간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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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엄태정 조각가가 17일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개인전 '세계는 세계화한다'를 열고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2025.06.17. [email protect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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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정, 공간의 존재 04-2 Presence of Space 04-2, 2004, Ink on paper, 149x105cm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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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정, 만다라-은하수 Mandala-The Milky Way, 2025, Acrylic, ink on canvas, 145x145cm-v2(crop) *재판매 및 DB 금지 |
조각에 그치지 않고 평면으로도 사유를 확장했다. 드로잉과 회화는 작가의 수행적 과정을 담은 도구다. 반복되는 비움과 채움, 섬세한 선과 빛의 조화를 통해 공간성과 시간성이 응축된다. 특히 이번 전시의 평면 작업은 브랑쿠시의 ‘무한주’를 연상시키는 형상으로, 조각과 회화, 사유가 맞닿는 경계를 보여준다.
“예술작품의 의미는 무궁무진하다”는 엄태정은 “조각은 우주이며 하늘이고, 땅이고 산이며 인간이며, 강이 될 수도 있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일까지 모두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조각은 세계의 모든 존재를 열어놓는 예술이라는 그의 신념이다.
이번 전시는 조각이 어떻게 존재를 드러내고, 또 다른 세계를 여는 방식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는 “조각 예술은 희로애락을 함께 초대하며, 그 안에서 신성과 상징성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며, 자신의 예술관을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유로 갈음했다.
“조각 작품을 제작하여 세워놓음은 봉헌과 찬양이라는 의미에서 세워 놓음이다. 봉헌한다는 것은, 조각이 세워짐으로써 성스러운 예술 작품이 성스러운 것으로서 개시되고 신이 그 현존성의 열린 장으로 들어오도록 부름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예술의 ‘성스럽게 함’을 뜻한다.” 전시는 8월 22일까지. 관람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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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개인전 '세계는 세계화한다'를 연 엄태정 조각가. 2025.06.17. [email protected] |
◆조각가 엄태정은?
1938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영국 세인트 마틴스에서 수학했다.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 연구교수를 거쳐 1981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를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2013년부터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제16회 국전 국무총리상(1967), 한국미술대상전 최우수상(1971), 김세중 조각상(1989), 이미륵상(2012) 등을 수상했다.
그동안 게오르그 콜베 미술관(베를린, 독일, 2005), 성곡미술관(서울, 2009), 아라리오갤러리(서울, 천안, 2019),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서울, 2022) 등에서 주요 개인전을 개최했다. 상파울루 비엔날레(브라질, 1973, 1975), 프리즈 런던 스컬프처(영국, 2019) 등 국제 무대에서도 활동했다. 서울 올림픽공원(한국, 1988), 두브로바 조각공원(크로아티아, 1990), 인천국제공항(한국, 2002), 베를린 총리공관(독일, 2002) 등 국내외 주요 공공장소에 작품이 설치되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포항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아라리오뮤지엄 등 국내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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