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요즘 작가'의 조용한 불안…애나 박, 흑백으로 그린 ‘굿걸’의 역설

2025.05.08

리안갤러리 대구서 한국 첫 개인전

2~4m 회화 최신작 14점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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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애나 박 작가의 한국 첫 개인전 '굿걸'전이 리안갤러리 대구에서 7일부 터 6월28일까지 열린다. 2025.05.07.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대구=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화면 가득 번진 목탄의 덩어리들. 흑백으로 폭주하는 얼굴들은 웃고 있지만, 그 표정은 어딘가 비어 있다.

7일 대구 리안갤러리에서 개막한 애나 박(Anna Park·29)의 국내 첫 개인전 'Good Girl'은  ‘여성’이라는 관념과 이미지, 그리고 그에 대한 감정의 균열을 무채색의 대형 드로잉으로 시연해냈다.

한국계 미국 작가 애나 박은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사회적 기대와 정체성의 혼란, 여성성의 표상 등을 주제로 작업해왔다. 2019년 팝아트 스타 카우스(KAWS)가 작품을 소장하며 이름을 알렸고, 2020년에는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 '맹크(Mank)'포스터 제작에 참여했다. 대학 졸업 1년 만인 2021년 뉴욕 하프 갤러리 개인전, 도쿄 블룸앤포 갤러리(현 Blum Gallery) 전시에서는 모든 작품이 완판되며 미술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세계적인 팝스타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가 소장한 작품이 앨범 특별판 커버로 사용되면서 작가의 인지도는 한층 더 높아졌다. 이후 SCAD 미술관, 서호주 미술관 등 주요 기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활동 반경을 넓혀왔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국내에서 선보이는 첫 개인전이자, 2025년 신작 14점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2m, 4m의 압도적인 크기로 전시장을 장악한 작품에 대해 리안갤러리 안혜령 대표는 "벌써 작품이 대부분 팔렸다"며 국내에서도 인기몰이를 시작한 작가의 면모를 먼저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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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미술전문기자] 애나 박 작가가 이번 굿걸 전시에 나온 작품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재판매 및 DB 금지


이날 전시장에서 만난 애나 박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대구인 고향에서 첫 개인전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1996년 대구에서 태어나 미국 유타에서 성장한 그는 “어린시절 피부와 생김새로 너무 다르다는 걸 느끼며 자랐다”고 회상했다. 20년 넘게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더욱 선명해졌고, 그 정체성을 가장 꾸준히 매개해온 수단이 바로 '드로잉'이었다.

“어릴 적 방구석에서 드로잉하던 게 제 아이덴티티의 시작이었어요.”

소셜미디어와 광고 이미지, 문화적 기호 속에서 길을 찾으려던 이민자 소녀에게 목탄은 감정을 붙잡는 가장 물리적인 도구였다.

그는 지금도 모든 작업을 이 재료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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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미술전문기자= 리안갤러리 대구 애나 박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전시장을 압도하는 것은 단연 목탄 드로잉의 스케일이다.

두꺼운 패널 위에 얹힌 검은 덩어리들은 순간 포착된 인물의 몸짓을 과장하고, 일그러뜨리며 감정의 잔상을 중첩한다. 그러나 그 감정은 뭉개지며 흐트러진다.

“회화는 대화의 방식이기보다는 관람의 장치 같아요.”

그녀는 감정이입을 유도하기보다는, 이미지의 구조와 충돌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정제된 톤에 유머를 한 스푼 섞었죠.”

회화는 감정의 전달이 아니라, 차단된 감정의 질감을 드러낸다. 작품은 여성의 몸과 사회적 기호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의도적으로 감정적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작가는 소셜미디어, 광고, 영화의 이미지들을 발췌해 조각내고, 레이어처럼 겹쳐 새로운 내러티브를 구성했다.

최근작에서는 텍스트와 프레임이 주요한 장치로 등장한다. 마치 50~60년대 미국 주부들을 위한 광고나 빈티지 앨범같은 향수를 자극한다.

광고 문구처럼 삽입된 문장들은 하나의 ‘장면성’을 부여하면서도 감정 이입을 차단한다. 마치 누군가의 메모장에서 잘라 붙인 단어들이 화면에 균열을 내는 듯 하다. 이는 '요즘 세대'의 SNS 놀이처럼 사진을 편집하고 합성하는 과정이 화폭으로 옮겨온 것이다.

“문자와 회화를 섞는 방식은 애드 루샤(Ed Ruscha) 전시를 보고 더 적극적으로 시도하게 됐어요. 그림을 나누고, 어지럽히고, 다시 조립하는 느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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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Again_Anna Park *재판매 및 DB 금지



“굿걸인가요?”라는 질문에는 “매일 달라요”라며 발랄하게 웃었다.

그 말은 ‘좋은 여성’이라는 사회적 요구에 대한 태도이자, 작가로서 자기 존재를 유연하게 흔드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어린 시절 애니메이션 작가를 꿈꿨고, 앞으로는 회화뿐 아니라 조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확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시 제목 'Good Girl'은 단순한 반어가 아니다.

작가는 “여성으로서 사회적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압박감”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캔버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소셜미디어 속 ‘이상화된 여성’ 이미지를 인용하지만, 작품 속에서는 그 관념을 벗어나 주체로 전환되는 몸짓을 보여준다.

이전 그로데스크한 분위기로 사로잡았던 신선한 충격과 달리 이번 전시 그림은 MZ작가의 거침없는 직진이 돋보인다. 거대한 화폭에 목탄으로 춤추듯 그려낸 작품은 혼종과 실험의 경계에 있다.  작가는 "앞으로 흑백이 아닌 컬러도 쓰고 싶다"며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했다. 

작품은 크지만 감정은 억제되어 있고, 강하지만 어딘가 텅 빈 느낌. 애나 박의 회화는 광고처럼 눈을 끌지만, 광고보다 더 조용한 불안을 남긴다. 그 불균형이 바로 '지금 세대'의 감정 구조를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전시는 6월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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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박 작품은 나무 판에 한지를 씌운 작품으로 옆에서 보면 매우 두꺼워 거대한 광고판 같기도 하다. *재판매 및 DB 금지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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