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안규철, 질문으로 엮은 전시
2025.08.22
국제갤러리 부산점서 4년 만의 개인전
'열두 개의 질문' 회화·조각·사진등 30여 점 공개
글과 그림, 언어와 이미지 경계에 선 작가의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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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22일 안규철 작가의 개인전이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개막했다. '열두 개의 질문'를 전시 제목으로 선보인 전시장에 비즈' 1300여개로 만든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설치 작품이 눈길을 끈다. *재판매 및 DB 금지 |
[부산=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Only others save us(오직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22일 개막한 안규철 개인전 '열두 개의 질문'은 이 문장을 통해 관객을 생각으로 불러들인다.
“나는 늘 내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부활은 타인 속에 있더군요”
이 날 부산 전시장에서 만난 안규철은 “예술은 나의 해답이자 동시에 타인의 구원이 될 수 있고, 반대로 나는 타인을 통해 구원받을 수도 있다는 성찰”이라고 말했다.
Only others save us. 1300여 개의 구슬이 줄지어 하나의 문장을 완성했다. 작은 존재들이 모여 커다란 글씨가 되는 구조는 ‘나와 타인이 함께 모여야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는 은유다. 무엇보다 이 작업은 작가가 아내와 함께 긴 시간을 들여 완성한 것으로, “구원은 혼자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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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4년 만에 개인전을 여는 안규철 작가.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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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철 〈외국어로 된 열두 개의 잠언〉 2024 Oil on canvas 12 pieces, each 41 x 53 cm Courtesy of Space ISU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재판매 및 DB 금지 |
이번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은 단순하다. “글은 어디서 시작되고, 그림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언어와 이미지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같은 문장을 불어·영어·독일어·중국어 등으로 적어두면 어떤 이에게는 ‘글’로 읽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단순한 ‘그림’으로 보인다. 글과 그림이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치다.
안규철은 이번 전시에서 예술의 본질을 외부 사물이나 표면이 아니라 관객의 인식과 감각에 둔다. 바울 첼란과 볼랑 등 그가 좋아하는 시인의 문장을 인용하며, “아름다움은 장미꽃 속에 있지 않고, 내 마음속에 있다”는 구절처럼 예술이 결국 타인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사건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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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안규철 작가가 두 개의 의자' 설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
◆회전하는 삶의 은유
전시장에는 원형 장치 위에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각기 다른 속도와 궤도로 회전하면서도 같은 원반 위에 머무는 구조다. 서로 부딪히며 중심을 지켜내는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안규철은 이를 두고 “왜 우리는 이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는가. 이 구조를 넘어설 수는 없는가”라고 질문한다.
안규철의 예술은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해 질문으로 끝난다. 오래전부터 그는 “글은 어디서 끝나고 그림은 어디서 시작하는가”라는 화두를 붙들어왔다.
이번 전시에서도 불어, 영어, 독일어, 중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적힌 문장이 등장한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활자지만, 다른 이에게는 회화적 이미지로 보인다. 결국 예술은 작품 밖이 아니라 관객의 인식과 해석 속에서 완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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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부산점 안규철 개인전 '열두 개의 질문' 설치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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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안규철 작가가 쓰임을 다한 장농 서랍을 다시 예술품으로 소생시킨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
◆ 예술가로서 쉼 없는 여정
이번 전시는 단발적 실험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이어온 궤적을 집약한다. 안규철은 4년 전 같은 공간에서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전업 작가로서 새 출발을 알린 뒤, 꾸준히 작업과 글쓰기를 병행해왔다. 경남도립미술관 '아카이브 리듬'(2023)에서는 독일 유학 시절 드로잉을 대거 공개했고, 청주시립미술관 '건축, 미술이 되다'(2023)에서는 흰 천으로 덮인 '56개의 방'을 선보이며 ‘방’ 시리즈의 새로운 변주를 보여주었다.
그는 동시에 '사물의 뒷모습'(2021), '안규철의 질문들'(2024),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2025)을 출간하며 ‘글 쓰는 예술가’로서 영역을 확장했다. 2024년에는 네 차례 전시에서 50여 점의 신작을 발표했다. 스페이스 이수 개인전 '안규철의 질문들―지평선이 없는 풍경'에서는 예술을 “세계와 삶에 대한 질문”이라고 정의했고, 이어 아마도예술공간 '12명의 안규철'에서는 서로 다른 자아들을 등장시켜 고정된 정체성 자체를 흔들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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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철 〈세 개의 수평선〉 2024 Oil on canvas 65.1 x 91 cm Courtesy of Space ISU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재판매 및 DB 금지 |
이번 전시 '열두 개의 질문'은 이런 흐름을 집약해 보여준다. 조소과 출신으로 처음으로 그렸다는 기울어진 지평선을 담은 회화 '세 개의 수평선'(2024), 다국어 문장으로 구성된 '외국어로 된 열두 개의 잠언'(2024), 처음 시도한 애니메이션 '걷는 사람'(2024), 피나 바우쉬에게 헌정한 싱글 채널 비디오 '쓰러지는 의자 – Homage to Pina'(2024)가 대표작이다. 이외에도 1990년대 퍼포먼스 사진, 집을 주제로 한 조각 연작까지 그간 덜 소개된 작업들이 함께 전시된다.
◆‘당연한 일’을 하는, ‘특성이 없는 작가’라는 역설
안규철은 “특별하고 별난 미술가가 아니라, 아침이 오면 해가 뜨는 것처럼 당연한 일을 하는 미술가가 될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다”고 했다. 거창한 선언이나 단발적 영감이 아니라, 반복과 관찰, 글쓰기와 질문 같은 일상의 리듬 속에서 예술이 드러난다는 그의 신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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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안규철 작가가 열두개의 질문들 개인전을 열고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
그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특성이 없는 작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작가는 늘 개성과 차별성을 주장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작업의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지 모두 고백한다면, 그래도 제 몫은 작품 안에 남을까요.”
안규철은 이러한 질문 자체가 어쩌면 자신의 ‘특성’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 길을 “작가적 자살”이라 부르면서도, 언젠가는 반드시 시도해보고 싶다고 했다.
이 전시는 예술가의 정체성과 창작의 본질을 묻는 질문으로 관객을 끌어당긴다. '열두 개의 질문'은 결국 “생각하라”는 명령어, 혹은 다정한 자극이다. “이게 뭐지? 왜 이렇지? 미술이란 게 이런 걸까?”라는 물음표가 사라지지 않고 끝내 살아남는다. 알고자 하는 욕망, 질문 또한 생각의 결과물이다. 그림 보다가, 지적 욕구가 터져버리는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다.' 전시는 10월 19일까지. 관람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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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철 〈쓰러지는 의자 – Homage to Pina〉 2024 Single-channel video, black and white, sound 6 min. 52 sec. Courtesy of Amado Art Space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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