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1945년생 ‘해방둥이’ 박대성 화백 “그림은 곧 나”…'화여기인'[문화人터뷰]

2025.08.15

리안갤러리 대구서 첫 개인전

연초록 능수버들 신작 '유류' 등 16점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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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14일 대구 리안갤러리에서 박대성 화백이 연초록 능수버들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2025.08.14.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대구=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그림이 곧 그 사람이다."

‘한국화 거장’ 소산(小山) 박대성(80) 화백이 대구 리안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화여기인(畵如其人)'을 연다.

오는 21일부터 거대하고 호방한 ‘박대성 표’ 수묵·채색 작품 16점을 한 자리에서 선보인다. 세로 7m 대작 '폭포'부터 가로 7m '덕수궁 설경', 2m 크기의 '유류' 연작 신작이 전시장을 채웠다.

특히 2층에 공개한 '유류' 연작은 화면 가득 늘어진 초록 능수버들이 커튼처럼 드리워져 싱그럽고 생동감이 넘친다.

14일 전시장에서 만난 박 화백은 “연초록 능수버들은 생명력”이라며 “경주 물가에 늘어선 버드나무의 기운을 붓끝에 옮겼다”고 말했다. 수묵 위에 얹힌 가지의 리듬은 바람에 흔들리는 듯 경쾌하고, 화면 중앙의 만월과 한옥은 고요한 신비를 더한다.

그는 “주변의 실재(實在)를 보고 옮기는 것이 곧 공부이자 스승”이라고 말한다. 이 철학은 색채를 대하는 방식에도 깊이 스며 있다. 오방색에 우주의 모든 색이 깃들어 있다고 믿은 선조들의 세계관을 따라, 그의 먹빛은 단순하면서도 간결하다. 전통 재료와 강렬한 필법, 절제된 색채 배합 위에 공간을 아우르는 대규모 스케일과 다시점(multiview) 구도가 더해질 때 비로소 그의 작품은 완성된다.

화면에 매번 만월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 “달은 우리 민족이 모두 좋아하는 상징이지 않냐”는 박 화백의 말처럼, 능수버들의 연초록 가지는 달빛을 머금고 화면 속에 한 폭의 시를 만든다. 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과 그림자는 잔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듯 번져나가고, 그 위로 내려앉은 달빛은 고요히 세월을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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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대구 리안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처음으로 연 박대성 화백이 "앞으로 그림에 쓰는 글씨는 한글을 쓰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1층 대작 '폭포' 아래에는 그의 한글 시구가 도필(刀筆)로 새겨졌다. 그간 한문을 써오던 그는 “앞으로는 세종대왕이 만든 우리 글, 한글만 쓰겠다”고 선언했다.  “붓을 칼처럼 쓴 것이죠. 그래서 선이 사납습니다.” 칼로 찍듯 힘차게 쓰인 글씨는 물줄기의 낙하와 결을 맞추며 화면 전체를 울린다.

가나아트 전속 작가인 박 화백의 이번 대구 전시는 안혜령 리안갤러리 대표의 ‘발견’에서 시작됐다. LA 가나아트 전시장에서 우연히 본 박대성의 능수버들 그림에 마음을 빼앗겼다.

“너무 놀라서 사진을 찍고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또 봤어요. 볼수록 너무 좋더군요. 과거의 풍경과 현대적 감각이 능수버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확실한 세계가 있다고 느꼈죠.”

안 대표는 그동안 박 화백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직접 작품에 깊이 몰입해본 적은 없었다고 했다. “너무 잘 그리시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제 분야가 아니라서 자세히 보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림을 구입해 두고 매일 보니, 버드나무가 과거와 현재를 잇고, 동양화가 현대와 호흡하는 부분이 보이더군요."

안 대표는 "대구에서 우리 전시장에서 새롭게 보여줄 수 있겠다 싶어 전시를 추진했다"고 말했다. 김선희 전 대구미술관장과의 인연, 가나아트의 협력으로 이번 전시가 성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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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성 설경 2025 Ink on paper 364 x 280 cm 사진= 리안갤러리 대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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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림이 될 수 있고, 그림이 내가 될 수 있다."

7m, 12m 대작을 작업하며 한국 수묵의 새로운 지평을 연 박 화백은 평생의 화업을 간단히 정리했다. “저는 줄곧 그림만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마칠 겁니다.”
 
젊은 시절 그는 그림을 ‘넘어서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몸에 새겼다. “신체적 불구를 극복하려고 죽기 살기로 그림에 매달렸다”고 했다. 가장 큰 스승은 자연이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히말라야와 중국 명산을 두루 찾았고, 송·원대 수묵화를 직접 마주하기 위해 대만 고궁박물관을 찾았다. 송나라 4대 수묵화가들의 대작 앞에서 받은 문화충격은 오래 남았다.

현대미술의 실체를 확인하러 뉴욕으로 향했던 그는, 마천루 사이로 떠오른 보름달을 보고 깨달았다. “불국사의 달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대미술은 이미 내 안에 있었습니다.” 곧장 귀국해 불국사에 1년간 머물며 설경을 세 구간으로 나눠 그렸고, 1995년 길이 13m의 '불국사 설경'을 완성했다. ‘그림에서 빛이 난다’는 평가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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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성 유류 2024 Ink and color on paper 192 x 130 cm 사진=리안갤러리 대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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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성, 고미 *재판매 및 DB 금지


색채 확장의 계기도 솔직하다. “가난했어요. 그림을 팔아야 먹고 살던 때라 ‘왜 맨날 시커멓게만 하느냐’는 말을 듣고 색을 조금씩 넣기 시작했죠. 오방색 질서 속에서 기물과 풍경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걸 사람들이 더 좋아하더군요.”

1945년생, 해방둥이인 그는 한국전쟁 당시 왼팔을 잃고도 독학으로 화업을 이뤘다. 1969~1978년 국전 8회 입선, 1979년 중앙미술대전 대상 등 화단에 뚜렷한 궤적을 남겼다.
 
1972년 대만 공작화랑에서 개인전을 연 뒤, 1984년 가나화랑 개관과 함께 전속 작가가 된 박 화백은 독창적인 화풍에 힘입어, 리얼리티 현대미술의 대세 속에서도 수묵화의 위엄을 지켜왔다. 전통화의 위기 속에서 그의 생존 전략은 ‘새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옛것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 화단의 세계적 조류인 모더니즘에 과감히 올라탔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부터 BTS RM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애호가층을 확보하며,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1999년 경주 삼릉에 작업실을 마련해 천년고도의 자연을 화폭에 담아온 그는, 2015년 작품 830점을 기증해 솔거미술관 건립의 기초를 놓았다. 연세대 국제캠퍼스(인천 송도)에도 ‘박대성·정미연 미술관’이 세워질 예정으로, 대표작과 부인 정미연 화가의 작품을 대학에 기증했다. “나라가 살아나려면 젊은이를 잘 가르쳐야 한다”는 소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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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박대성 화백과 부인인 정미연 작가가 리안갤러리 대구에서 첫 개인전에 선보인 신작 초록 능수버들 작품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202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에서 한국 작가 최초 개인전을 연 그는, 하버드대·다트머스대·찰스왕센터 등 순회전을 거치며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이 전시는 관람객 호응에 힘입어 두 달 연장됐고, 포브스(Forbes)에도 집중 조명됐다. 올 하반기에는 샌프란시스코 전시를 앞두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능수버들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연초록 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과 그림자는 박 화백이 걸어온 70년 화업과 맞닿아 있다. ‘전통’이라는 뿌리에서 뻗은 현대적 감각이, 버들가지처럼 유연하고도 단단하게 세계로 향하고 있다.

박대성 화백은, 사그라져가던 한국 전통화의 맥박을 다시 뛰게 하는 심장 같은 존재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길을 걸으며, 여든의 나이에도 왕성한 작업을 이어가는 그의 철학은 단순하다.
“마음을 닦고 다스리는 것이 먼저고, 맑고 부끄러움없는 삶의 태도가 먼저다. 자비로움과 자유로움, 거리낄 것 없는 삶의 태도를 100% 실천하느냐가 목표이다. 그래야 붓도 제자리를 간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예술의 완성된 경지라고 생각한다."(소산 박대성)
리안갤러리 대구에서 전시는 10월 18일까지 열린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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