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박지성 장모' 오명희, 자개의 빛으로 우주를 짓다[문화人터뷰]

2025.05.13

'피어나는 빛, 봄의 숨결'…옻칠 자개 회화 20점 전시

이화익갤러리서 개인전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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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테르 Aether, D130cm, soil powder, hemp cloth, lacquer, pure gold leaf, mother of pearl, crystal, 2025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내 그림은 별빛처럼 잠깐 반짝이지만, 우주의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고요한 블랙홀, 눈부신 은하계, 그 사이의 무한한 공간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파헤치는 여정이다. 이 작품들은 광활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독과 경외감, 그리고 그 모든 것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희망의 파편을 담고 있다"

13일 서울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에서 만난 오명희(69)화백은 천상 화가였다. "작업은 제 구원"이라며 "세상에 ‘오명희’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저는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이 말처럼 밀도가 높은 작품은 그의 영혼을 갈아 넣은 흔적이다. 원형 캔버스 위에 펼쳐진 옻칠과 자개, 금박의 화면은 강렬한 생기를 품고 있다. 자개 조각들은 밤하늘의 별무리처럼 흩어지고, 그 중심에서 퍼져 나오는 정제된 에너지에 이끌리듯 화면에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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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미술전문기자] 13일 이화익갤러리에서 만난 오명희 화백.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 이화익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피어나는 빛, 봄의 숨결 Aether in Bloom'은 ‘에테르(Aether)’ 시리즈와 ‘제니스(Zenith)’ 시리즈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전시 작품과 작업 세계관을 들어봤다.

◆이번 개인전 ‘피어나는 빛, 봄의 숨결’은 어떤 영감에서 시작되었나요?
처음엔 자연을 그렸어요. 스카프가 날아가는 장면을 그리다가, 어느 순간 그 스카프가 새가 됐죠. 그런 변화처럼 제 작업도 확장됐어요. 2022년 베니스에서에 전시했을 때, 한국 여성들의 삶-특히 첩 이야기, 달 이야기, 가족 사진 같은 것들이 생각났어요. 당시 유럽문화센터(ECC)의 초청으로 베니스 팔라조 모라에서 열린 특별전에 참여했는데, 한국전쟁 종식 이후 여성 해방기의 집단적 기억을 주제로 한 작업을 선보였죠. (이 전시는 베니스 비엔날레를 찾은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제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괴로워하셨어요. 어느 날 밤, 달이 유난히 밝았는데 어머니가 우물가에 계셨어요. 뭔가 술렁이는 분위기였고, 이후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 달 밤의 감정이 강하게 남아 있어요. 벙어리 처녀를 아버지 방에 들인 날이었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 기억이 제 작업의 발단이 됐어요.

◆대표작 ‘에테르(Aether)’ 시리즈에는 어떤 상징과 서사가 담겼나요?
우리 집 가족사진 속에 큰할머니와 작은할머니, 두 명의 할머니가 나란히 있는 걸 보면서 흥미를 느꼈어요. 여성의 삶을 이야기로 풀고 싶었고, 나혜석 같은 신여성에서 전통적인 어머니상, 마릴린 먼로까지 시대와 정체성이 다른 여성들을 작업 속에 담았죠.

마릴린 먼로가 6.25 전쟁 당시 위문공연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눈 오는 날 끈나시를 입고 열심히 공연을 했대요. 따뜻한 봄 같은 순간이죠. 자서전을 보면 무대 공포증도 있었고, 백치미로 몰려서 괴로움도 많았다고 해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걸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참 감동이었어요.

제 그림은 화사하지만, 예쁘다고만 보면 공감 못 해요. 그 안엔 삶의 애증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있어요. 나이로비 국립뮤지엄에서 기생을 주제로 작업한 것도 그런 맥락이죠. 돌출된 달을 표현하고 싶어 우리 전통 노래인 강강수월래를 떠올렸어요. 강강수월래 노래를 하듯 자개를 빙빙 돌려서 작업했죠. 부조 형태의 원형 바탕이 된 그곳에 달도 있고 빛이 있죠.

최근엔 자연을 직접 손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옻칠을 장갑 낀 손으로 그리기도 해요. 이제 제 작업은 달에도 스톤이 있다고 상상하면서, 우주의 광물질을 자개와 색으로 구현했어요. 설악산 비룡폭포에서 정기를 받은 느낌, 산청의 바위에서 에너지를 받는다는 신념 같은 것도 제 작업에 녹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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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nith, 194 x 130cm, pure gold leaf on canvas, mother of pearl, acrylic, 2025 *재판매 및 DB 금지


◆전통 재료인 옻칠, 자개, 금박을 회화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공예적인 요소를 본격적으로 끌어들인 건 2008년부터예요. 자개는 어릴 때부터 집에 자개 장이 있어 친숙했고, 실은 제가 화려한 것을 좋아해요. 아름답고 공들이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데, 근래에 들어 공예적인 것을 끌어들인 것을 잘했다는 생각이에요. 한국적이고 여성적이고 저와 딱 맞는 작업이죠.

◆작업 과정에 있어 어려운 점이나 시스템 구축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요?
옻칠장은 따로 없어서 말리는 게 정말 고역이에요. 말리다가 미칠 때도 있어요(웃음). 도와주는 제자가 두 명이 있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와서 같이 해요. 이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에요. 직업병처럼 어깨가 아파서 시술도 다섯 번이나 받았어요. 하지만 열심히 합니다. 열심히 하는 것에 자부심 있어요. 세계적으로 작업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크고, 도와주는 시스템이 필요해요. 쿠사마 야요이 같은 시스템이 부러워요.

작가로서 슬럼프도 있었어요. 학교(수원대학 미술대학 교수) 가야지, 애 셋 키워야지, 그림도 그려야지… 시간이 없어서 화랑에서 작품 달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철렁했어요. 한때는 팔리는 게 싫기도 했고요. 그래서 일본 동경예술대학 객원교수로 가면서 작업세계가 달라지는 계기가 됐어요. 살랑이는 커텐처럼 내리는 벗꽃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때 금박도 배웠지요. 일본에서 시간을 가지고 좀 쉬고, 다시 힘을 얻었죠.  애들 기를 때 너무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짬을 내 15분 동안 집중해서 그리니까 많이 그리더라고요. 그래서 전 학생들한테도 “15분만 집중하면 많이 그릴 수 있다”고 말해요. 정말 그렇게 해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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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미술전문기자]오명희 화백 *재판매 및 DB 금지


◆작품에는 기억과 시간의 층위, 존재에 대한 철학이 느껴집니다.
저는 제 나름의 달을 그려요. 그러다 보면 별도 그리고 스톤도 그리게 돼요. 거기서 오는 기운이 있어요. 우주에서 오는 좋은 에너지라고 할까요. 그게 ‘우주적 시간’이에요. 오로라처럼 흔한 이미지가 아니라, 훨씬 깊은 감각이죠.

남편과 함께 설악산에 자주 가요. 눈이 와도 가요. 그 산에 어떤 에너지가 있어요. 그걸 느끼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그 감각이 작업에도 들어가는 거죠.

◆박지성 선수의 장모님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작가로서 부담은 없으셨나요?
솔직히 말하면, 작가로서는 불편해요. 물론 '박지성 장모'라는 수식어 때문에 언론에서 다루기도 하지만 말을 더 조심하게 되죠. 저는 현실감도 없고, 계산이 없는 사람이에요. 박서방이 와도 밥 차리기 전까지는 작업을 해요(웃음). 애틋하게 사랑하지만 돌봄은 잘 못 해요. 그래서 미안함도 항상 있고요. 우리 사위는 표현을 잘 안 해요. 그런데 제 작품 중에 좋아하는 그림이 있다고 딸을 통해 들었는데 기분이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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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희 개인전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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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희 개인전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앞으로 더 깊이 탐구하고 싶은 주제나 방향이 있다면요?
저는 몸집은 작지만 스케일이 있는 큰 작가예요. 더 큰 작업, 입체로 확장하고 싶어요. 지금은 '스톤'에 꽂혀 있어요. 그냥 돌이 아니라, 오만에서 봤던 반짝이는 광물질, 그걸 그리고 싶어요.

그림이 없었다면 삶이 버거웠을 거예요. 어릴 땐 만화를 그리느라 밤을 새웠고, 블라우스가 새까매질 정도로 그림을 그렸어요. 어떤 선생님이 저한테 “그림 안 그렸으면 무당이 됐을 사람”이라고 했는데, 진짜 맞는 말 같아요. 스카프가 날아가고, 구름 위에서 까르르 웃고, 신명나게 춤추는 그 장면. 그게 뭔지 알 것 같거든요.

한편 이화익갤러리와 오명희 화백과의 인연은 2024년 아부다비 아트에 참여하면서다. 길이 4m정도의 대형 작품을 포함한 3-4점의 오 화백 작품은 모두 판매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의 여류작가로서 정체성을 갖고 K아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그는 이제 세계에서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기억과 우주의 에너지’를 동시에 껴안는 화면, 정제된 공예적 노동과 깊은 감정선이 교차하는 회화 앞에서 관람자는 눈앞에 펼쳐지는 ‘빛의 우주’를 천천히 항해하게 된다. 전시는 31일까지.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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