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밟아보라, 그물 위를”…리움미술관, 칼 안드레 '격자 조각'
2025.07.04
'현대미술 소장품'전 속 '걷는 조각'
구리·철판 81개로 재구성한 신화적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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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안드레, <81개의 구리, 철 (헤파이스토스의 그물)>, 1981, 구리, 철, 457.2 x 457.2 x 0.5cm, 전시 전경 (사진: 리움미술관)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당신이 걷는 그 순간, 이미 그물에 걸린 것이다.”
리움미술관 M2 공간 '현대미술 소장품전' 한복판.
철과 구리로 이루어진 정사각형 81개가 바닥 위에 정연하게 깔려 있다. 누군가는 그저 타일 장식으로 스쳐 지나가지만, 누군가가 그 위를 밟는 순간, 당신도 모르게 작품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이 정갈한 금속 격자의 이름은 칼 안드레(Carl Andre)의 작품 '81개의 구리, 철'(1981). 미니멀리즘 조각의 전범이라 할 그의 작업 가운데서도, 이 작품은 유독 기이한 부제를 달고 있다.
'헤파이스토스의 그물'.
헤파이스토스는 그리스 신화 속 대장장이 신이다.
그는 제우스의 번개창과 포세이돈의 삼지창, 아킬레우스의 방패와 신발을 만들고, 최초의 여성 ‘판도라’까지 창조한 조각의 신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외면받은 존재였다. 어머니 헤라에게 버려지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배신당한 그는, 그 고통을 ‘그물’로 엮어 복수의 도구로 바꿔놓는다. 아프로디테와 아레스의 밀회를 잡아내기 위해 짠, 보이지 않는 금속 그물.
칼 안드레의 작품은, 바로 그 전설 속 ‘그물’에서 출발한다.
구리와 철. 두 금속의 차가운 피부가 반복적으로 병치되며 조형적 질서를 이룬다. 좌대 없이 바닥에 납작하게 붙은 이 조각은, 관람자에게 말을 건다.
“밟아보라, 그물 위를.”
관객이 그 위를 걷는 순간, 작품은 감각에서 서사로 이행한다.
단순했던 격자는 신화적 장치가 되고, 발자국은 ‘걸린 자’의 흔적이 된다. 안드레는 항상 이야기와 상징을 철저히 배제해왔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예외처럼 보인다. 신화라는 고대의 서사를 작품의 가장자리에 달아, 미니멀리즘의 규율을 살짝 흔들어놓는다.
리움 소장품연구실 태현선 수석연구원은 말한다.
“이 부제로 인해 격자 패턴은 하나의 ‘그물’이 되고, 금속의 색은 헤파이스토스의 작업대 위에서 달궈진 금과 철의 빛을 연상시킵니다. 작가는 자신을 고대 대장장이 신에 빗댄 것일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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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개의 구리, 철 (헤파이스토스의 그물)> 작품 위를 걷는 관람객, (사진: 강다정) *재판매 및 DB 금지 |
이제 이 바닥 조각은 더 이상 ‘보기만 하는’ 대상이 아니다.
관객은 시각에서 촉각으로, 조각 바깥에서 조각 내부로 이동하며 신화의 감옥에 발을 들인다. 작품 위를 걷는다는 행위는 곧 '그물에 걸린다'는 행위와 맞닿아 있다.
결국, 이 그물은 헤파이스토스가 아닌 ‘칼 안드레’라는 또 다른 신이 쳐놓은 장치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리움의 조용한 전시장 한복판.
무심코 발을 들여놓은 당신은 이미 그물에 걸려 있다.
누가 먼저였는지 중요하지 않다. 그물을 쳐둔 이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관객은 언젠가 반드시 걸릴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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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 현대미술 소장품전 전경, 오른쪽 조각상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 3 작품. *재판매 및 DB 금지 |
'리움 현대미술 소장품전'은 삼성문화재단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자리로, 리움미술관 재개관 이후 3년 만에 선보이는 상설 소장품전이다. 이번 전시는 M2와 로비 공간을 중심으로 총 44점, 35명의 작가 작품이 공개되며, 칼 안드레의 '81개의 구리, 철(헤파이스토스의 그물)'을 비롯해 국내외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을 체감할 수 있는 작품들이 관객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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