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피라미드가 수신한 박종규 ‘영원의 코드’…"이집트 현재진행형 문명국"[박현주 아트클럽]
2025.11.16
기자 피라미드서 국제현대미술제 ‘포에버 이즈 나우’ 개막
10개국 10명(팀) 참여…한국은 지난해 이어 두 번째
이규현 큐레이터 “박종규, 디지털과 영원 가장 선명히 구현”
피라미드 앞 전시 문명의 원점서 벌어지는 문화외교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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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로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15일 박종규 작가가 카이로 피라미드 앞에 설치한 '영원의 코드' 앞에서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2025.11.1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
[카이로=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이집트 기자 사막에 피라미드가 두 겹으로 서 있다. 뒤로는 7000년 전 석조 피라미드가, 앞으로는 빨강·노랑·파랑 3원색 구조물이 또 다른 피라미드의 윤곽을 그린다. 사각 프레임 안 삼각 구조물이 사막의 수평선을 가르고, 바닥에 박힌 아크릴 미러 조각은 돌처럼 빛을 튀긴다. 한국 작가 박종규의 신작 대지미술 ‘영원의 코드(Code of the Eternal)’가 고대 유산과 디지털 시대를 동시에 호출하는 순간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기자 피라미드(Pyramids of Giza)에서 가을마다 열리는 국제현대미술제 ‘포에버 이즈 나우(Forever Is Now)’가 15일(현지시간) 공식 개막했다. 아프리카·중동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야외 국제전으로 꼽히는 이 행사는 이집트 비영리 플랫폼 아르 데집트(Art D’Égypte)가 주최하고, 이집트 외교부·문화부·관광유물부의 후원과 유네스코 협력으로 열린다. 올해는 10개국 작가 10명(팀)이 참여했으며, 한국 작가로는 박종규가 유일하다. 피라미드 앞에서 신작을 선보이는 것은 지난해 강익중에 이어 두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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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규 <영원의 코드(Code of the Eternal> 설치. Studio J.Park, 이앤아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피라미드는 한국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고, 역사·언어·문명 간의 지속적인 연결을 예술로 표현하기에 완벽한 장소다."
박종규의 ‘영원의 코드’는 피라미드 고유의 기하학적 비례, 한국·이집트 고대 서사를 디지털 언어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빨강, 노랑, 파랑색의 정사각형 철 프레임 속 삼각형 구조는 실제 피라미드의 각도와 높이, 변 길이에서 도출한 수학적 수치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겉으로는 추상적이지만, 그 안을 이루는 수열은 임의로 뽑은 숫자가 아닌 ‘고대 피라미드의 비례 코드’다. 삼각의 구조물 앞 모래 위에는 약 1000개의 아크릴 미러 점(dot)이 흩어져 있다. 햇빛을 받으면 픽셀 노이즈처럼 반짝이는 이 점들은 작가가 쓴 시 ‘단군이 파라오에게 보내는 상상의 편지’를 모스 부호로 암호화한 결과물이다.
박종규는 이를 “감상용 텍스트가 아니라, 피라미드가 별자리를 통해 신에게 말을 걸던 것처럼 ‘위에서 보라고 쏘아올린 교감의 언어’”라고 설명했다. 설치물 옆 비석에는 이 암호가 영어·아랍어로 번역돼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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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로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15일 박종규 대지미술 신작 '영원의 코드'에 도트 거울로 설치된 모스부호를 관람객들이 해석하고 있다. 2025.11.1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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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로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박종규 작가가 '영원의 코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2025.11.1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
현장에서 만난 그는 피라미드 앞에서 작품을 처음 마주한 순간을 두고 “시간이 겹쳐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수천 년 전의 기하학과 제가 만든 디지털 구조가 한 화면처럼 이어져, 피라미드가 제 작품의 일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1년 전 답사에서 이미 전체 구조를 머릿속에 그려두었지만, 실제 설치 과정에서는 사막의 모래바람과 현지 제작 방식의 차이를 견디며 “이집트라는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해야 했다”고 말했다.
사막 위에 놓인 기하학 구조와 바닥을 이루는 도트 언어는 그 자체로 한국과 이집트, 고대와 디지털, 신화와 정보가 한 화면에 공존하는 장면을 만든다. 박종규는 동양적 사고가 “보이지 않는 질서와 순환을 읽는 감각”에 기반한다며, 이번 작품에 단군 신화의 문장을 모스 부호로 암호화해 넣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작품을 “아날로그 언어를 디지털 언어로 전환해, 시공간을 초월한 교감 언어로 다시 쏘아 올리는 장치”라고 정의했다. “한국이 디지털 문명의 중요한 리더로 성장한 지금, 그 감각과 언어를 피라미드라는 인류 문명의 원점 앞에서 다시 발화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박종규 작품을 본 김윤섭 미술평론가는 박종규 작업의 ‘언어성’을 짚었다. “피라미드에서 추출한 숫자열과 단군 신화를 모스 부호로 암호화한 구조는 단순 설치가 아니라 문명 간 언어 교환에 가깝다”며 “아날로그 감성과 디지털 시대 전환의 경계에서 양쪽을 중계하는 역할을 해냈다”고 말했다.
김 평론가는 “모스 부호처럼 시대·국가·종교를 초월한 공통 기호를 조형 언어로 재해석한 점이 독창적”이라며 “디지털 언어가 결국 1과 0의 구조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조형적으로 환기시키는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번 작품은 전시용 이벤트가 아니라, 디지털 세계를 기반으로 축적해온 박종규 작업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 깊이를 더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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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포에버이즈 나우 한국 큐레이터인 이규현씨가 피라미드 앞에 설치된 박종규의 '영원의 코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25.11.1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
이규현 큐레이터는 올해 '포에버이즈 나우' 전시의 핵심 키워드를 “디지털과 영원”이라고 규정하며, 박종규가 이를 가장 명확히 구현한 작가라고 평가했다.
그는 “피라미드의 수학, 디지털 노이즈, 단군 신화가 한 구조로 엮인 작업”이라며 “고대 문명 한가운데서 K-아트가 자신만의 언어로 발언하는 드문 장면”이라고 말했다.
이규현 큐레이터는 사실상 이집트 현장에서 한국 미술의 ‘민간 외교관’이다. 지난해 강익중의 ‘한글 신전’에 이어 올해 박종규의 ‘영원의 코드’까지, 그는 한국 작가들을 최초로 피라미드 앞으로 세워 ‘K-아트’를 고대 문명 중심부로 진입시켰다.
그는 “7000년 문명과 현대예술을 연결하는 일, 그 사이에 한국 예술을 세우는 건 국가 브랜드 확장과 직결된다”고 했다. 이어 “이집트는 단 한 번도 변두리였던 적이 없는 문명국이며, 지금도 지정학·문화·종교 모든 측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나라”라며 “한국 예술이 세계로 향하는 과정에서 이집트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명의 관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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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로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7000년 전 피라미드의 실루엣이 박종규의 ‘영원의 코드’와 정확히 이어지며 하나의 구조처럼 보인다. *재판매 및 DB 금지 |
이집트가 피라미드를 문화외교 무대로 삼는 데는 분명한 전략이 있다. 기자 피라미드 단지는 2023년에만 1470만 명이 찾았고, 이는 이집트 전체 관광객 수와 거의 동일하다. 2024년에는 방문객이 약 1570만 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부는 2028년까지 관광객 3000만 명 유치를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피라미드 앞에서 국제 현대미술제를 연다는 것은 단순한 전시가 아니다. 문화·관광·국가 브랜드를 하나로 묶어 세계에 발신하는 전략적 선택이다. 올해 개막식은 세 개의 피라미드가 동시에 보이는 지점을 특별 개방해 진행됐다. 지난해 스핑크스 앞 개막보다 훨씬 강력한 상징 자본을 활용한 셈이다.
‘포에버 이즈 나우(Forever Is Now)’는 이 전략의 최전선에 배치된 국제전으로, 이집트는 고대 문명의 절대적 상징 위에 현대미술과 각국 작가를 올려놓으며 “이집트는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 문명국”임을 증명하려 한다.
최근 개관한 ‘이집트 대박물관(GEM)’과 피라미드 현대미술제의 정례화는 이러한 국가 전략을 뒷받침하는 수단이다. 관광 수입·해외 송금·수에즈운하 통행료라는 기존 경제 구조의 한계를 넘어, 고대 문명을 21세기형 문화산업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다.
◆이집트를 모르면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문명의 원점에서 벌어지는 문화외교
‘포에버 이즈 나우’는 단순한 야외 설치전이 아니라, 문명의 원점과 오늘의 예술을 직접 연결하는 문화외교의 장이다. 전시를 주최한 나딘 압델 가파르(Nadine Abdel Ghaffar) 아르 데집트 설립자는 “포에버 이즈 나우는 고대 이집트 역사와 현대미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글로벌 대화의 장”이라고 설명했다. 고대 피라미드가 더 이상 ‘과거의 박물관’이 아니라, 세계 각국 작가들이 참여하는 문화외교 무대로 재가동되고 있다는 의미다.
최병선 주이집트 총영사는 “이집트를 알지 못하면 세계사의 축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이곳은 7000년 문명의 발원지이자 지금도 아랍권 최대 인구를 가진 지정학의 중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집트를 “한때 주변부였다가 중심으로 복귀한 나라가 아니라, 처음부터 중심부였던 문명국”이라고 규정하며 “이집트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G7급 국가 논의에도 접근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흔히 알려진 5000년 역사보다 더 깊은, 선사시대까지 포함한 7000년 문명의 연속성을 가진 나라가 바로 이집트”라며 “현재도 아랍권 최대 인구(1억 2000만 명)를 가진 지역의 핵심국”이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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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로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피스톨레토의 스테인리스 구조물을 세우고 바위로 둘레를 친 거대한 신전 같은 작품. *재판매 및 DB 금지 |
올해 전시에는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VHILS, 리사이클 그룹, 나딤 카람, 브라질의 아나 페라리, 프랑스–베냉의 킹 우데크핑쿠, 이집트 작가 살라 엘 마스리 등이 함께했다.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 피스톨레토는 아르테 포베라의 대표 작가로, 반영(reflection)과 참여를 강조해온 인물이다. 사막에 놓인 그의 스테인리스 구조물과 둘레의 바위들은 일종의 현대적 제의 공간처럼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드러낸다. 피라미드의 거대한 석조 구조와 대구를 이루며 고대의 무게와 현대의 가벼움이 교차하는 경계를 만든다.
특히 카이로 출신 작가 살라 엘 마스리의 설치는 이번 전시의 ‘신화적 무게’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고대 왕이 쓰던 반지를 거대한 스케일로 확대한 구조물로, 정면에는 커다란 환(環)이 뚫려 있다. 관람객이 그 안쪽에 서면 양옆에서 마아트(Maat)가 심장을 재는 고대의 심판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집트에서는 심장이 깃털보다 가벼워야 피라미드 너머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고 믿었다. 엘 마스리는 이 오래된 사후 세계의 서사를 현대 조각 언어로 다시 불러내 사막 위에 거대한 ‘균형의 눈’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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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로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고대 왕이 쓰던 반지를 거대한 구조물로 선보인 이집트 작가 살라 엘 마스리의 작품. 2025.11.1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
박종규의 이번 피라미드 프로젝트는 씨아이에스(CIS)와 공익재단 아이프칠드런(AIF)의 후원이 더해져 완성됐다. 기술 산업과 공익 예술이 함께 만든 이 구조물은, 고대 문명의 발원 앞에서 또 하나의 ‘미래 언어’를 쏘아 올렸다.
해 질 무렵, 피라미드는 신화의 출구처럼 빛났다. 사막의 바람이 잠시 멎는 사이, 10개의 작품은 각각의 방식으로 ‘영원’을 말했고, 피라미드는 그 모두를 묵묵히 받아 적는 듯했다. 전시 제목 ‘포에버 이즈 나우(영원은 지금)’은 그 순간 더 이상 전시의 표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대가 미래에게 보내는 재발신된 메시지, 지금 이곳에서 다시 가동되는 문명의 선언에 가까웠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이어진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