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슬픈 전설’ 천경자, ‘찬란한 전설’ 첫 페이지 열었다 [박현주 아트클럽]
2025.09.23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전 20년 만의 회고전
서울미술관, 24일 개막…채색화등 150여 점 집결
위작 논란 30년 종지부…작품 세계 집중 조명
미인도 없는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전시
![]() |
[[서울=뉴시스] 황준선 기자 = 23일 서울 종로구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언론 공개 행사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가 전시돼 있다. 2025.09.23. [email protected]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돌아보면 저의 후반기는 ‘에어포트 인생’ 아니었나 생각해요. 여성의 몸으로 스케치북 하나 들고 원시의 땅, 미지의 대지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현장은 늘 살아움직였고 또 현장감이라는 순간의 아우라가 저를 미지의 세계로 이끌었어요.(생전천경자 화백 인터뷰중)"
한국화 거장 천경자(1924~2015) 작고 10주기를 맞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서울미술관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가 '위작 논란'의 그림자를 넘어, 진짜 천경자의 얼굴을 마주하게 한다. 2006년 갤러리현대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 이후 20년 만에 열리는 최대 규모 회고전이다.
23일 서울시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만난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은 “이번 전시는 정말 쉽지 않았다. 생전 ‘고약한 화가’라는 소리를 들었던 천경자가 지금도 여전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 기자가 ‘천경자의 재조명은 시효의 끝에 와 있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전시를 준비했다”며 “흔쾌히 작품을 내준 소장가들과 미술관, 옥션사에 감사를 전하지만, 두 번은 하기 어려운 전시”라고 강조했다.
"‘위작 논란’, ‘미인도 사건’이라는 말은 더 이상 천경자 작가를 따라다니는 단어, 수식어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건은 91페이지 책의 한 장에 기록된 하나의 해프닝.
,선생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떠나셨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천경자 작가를 더 이상 '위작 논란'이나 '한(恨)을 그리는 여자 작가'가 아닌 근대사의 큰 풍랑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해 낸 한 명의 위대한 예술인으로 추앙하고자 합니다."(서울미술관 )
,선생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떠나셨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천경자 작가를 더 이상 '위작 논란'이나 '한(恨)을 그리는 여자 작가'가 아닌 근대사의 큰 풍랑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해 낸 한 명의 위대한 예술인으로 추앙하고자 합니다."(서울미술관 )
![]() |
안진우 서울미술관 이사장은 “유족 모두가 어머니를 향한 향수를 짙게 지니고 있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믿음 하나로 전시를 준비했다”며 “천경자를 더 이상 ‘위작 논란’이나 ‘미인도 사건’이 아닌 한 명의 예술가로 바라봐 달라”고 당부했다.
실제로 천경자는 위작 논란과 유족 반발로 인해 대규모 회고전이 쉽지 않았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상설 전시장이 있지만, 지난해 탄생 100주년 전시는 고향 전남 고흥에서만 열려 거장의 위상에 비해 아쉬움이 컸다.
30여 년간 한국 미술계의 아픈 그림자였던 ‘미인도’ 위작 논란은 최근 대법원 판결로 유족 패소가 확정되며 법적 공방에 종지부를 찍었다. 법원이 진위를 직접 판단한 것은 아니지만, 검찰 감정의 정당성을 인정한 셈이다. 이제는 ‘위작’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예술가 천경자의 작업 세계 자체로 돌아가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 |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23일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이자 서울미술관 회장이 천경자 예술세계를 조망하는 대형 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를 기자 간담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
"1983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한 한 뒤 작고 10주기를 맞는 2025년 지금까지 천경자 선생님은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되지 않았습니다. 한국 미술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보아도 그 조건에 부족치 않고, 예술인에 대한 존중의 차원에서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천경자 선생님은 여전히 논란 위에 존재합니다.우리 모두 가슴 아파해야 하는 일입니다. (서울미술관 안병광 회장)
그는 “천경자의 91페이지 인생은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로 남겨야 한다”며 "논란이 된 '미인도'를 과감히 빼고, 거장의 삶과 예술을 작품으로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대표 채색화 80여 점을 한자리에 모으는 과정에서 아쉬운 일화도 있었다. 대여를 추진하다 끝내 불발된 작품이 있다. 붉은 색채가 강렬한 '볼티모에서 온 여인' 작품이다.
이전에 눈여겨본 작품이었지만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서경배 회장 컬렉션에 들어가 아쉬움이 남았다. “꿈속에도 나온 작품”이었던 이 작품은 이번 전시에 빌려오려 했으나 최종적으로 무산됐다. 대신 서 회장은 ‘사월이’를 보내 전시에 힘을 보탰다. 안 회장은 해당 이미지의 판화를 소장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내놓지 않았다. 그는 “그림도 다 인연 따라 움직인다”는 철학으로 그 아쉬움을 받아들였다.
천경자의 작품은 경매 시장에서도 높은 가치를 입증해왔다. ‘초원Ⅱ’(1978)는 2018년 20억 원에 낙찰돼 작가 최고가를 기록했고, ‘정원Ⅱ’는 17억 원, ‘테레사 수녀’는 8억8000만 원, ‘막은 내리고’는 8억6000만 원, ‘놀이’는 8억3000만 원에 거래됐다. 여성 화가로서 드물게 10억 원대 시장을 형성한 위상이다.
![]() |
[[서울=뉴시스] 황준선 기자 = 23일 서울 종로구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언론 공개 행사에 '막은 내리고'가 전시돼 있다. 2025.09.23. [email protected] |
"천경자가 그린 수많은 여성상은 ‘미인도’가 아니라 ‘여성 초상화’이다. 미인도는 대체로 남성 화가의 관점에서 곱게 단장한 일종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그린 것이고, 대부분 그 향유층도 남성이었다. 반면 천경자의 여성 초상화는 대부분 주변에 실재하는 모델을 그린 것으로, 당당하고 자기감정에 충실한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여성을 보여준다.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성의 한과 욕망, 불안한 미래에 대한 꿈과 환상이 뒤범벅된 모습을 솔직하게 담았다.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실장)
![]() |
[서울=뉴시스] 황준선 기자 = 23일 서울 종로구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언론 공개 행사에 초상화들이 전시돼 있다. 2025.09.23. [email protected] |
1995년 71세의 천경자 작가는 호암갤러리에서 진행된 첫 번째 회고전을 성황리에 마친 뒤 건강이 나빠져 98년 9월 한국 생활을 접고 큰 딸이 머물고 있는 미국 뉴욕으로 떠난다. 같은 해 11월에 일시 귀국해 그 동안 고이 간직해온 채색화 57점과 드로잉 39점을 비롯해 붓, 물감 같은 화구를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나의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일반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는 뜻과 함께 일체의 저작권을 서울시에 위임한다. 당시 이 일은 ‘평생을 바친 원로화가의 예술혼 선물’이라고 불렸다. 천경자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저작권과 작품을 환원한 최초의 작가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대표 화업인 채색화 80여 점을 비롯해 저서, 도서 장정, 성장 과정과 제작 노트, 여행기 사진과 편지 등 150여 점의 아카이브를 망라했다.
서울미술관은 1000평 규모 제1전시장을 8개 파트로 구성했다. 자화상·가족, 여인의 얼굴, 여행과 풍경, 문학과의 대화, 한과 슬픔, 영혼과 종교, 화려한 여정, 그리고 추모 공간으로 나눴다. 관람객이 직접 작가에게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참여 존도 마련했다.
세상을 비추는 여인 鏡子 전라도 남단 고흥에서 태어난 천옥자(千玉子)는 1941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경자 (鏡子)로 이름을 바꿨다. 더 넓은 세상을 비추는 화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채색 인물화와 풍물화로 대별되는 천경자 화백의 예술세계는 1969년을 기점으로 잡아 그 이전을 꽃과 여인을 주로 한 채색화 시기, 그 이후는 세계를 기행하며 스케치해서 그린 풍물화 시기로 볼 수 있다..(중략)
천경자 화백은 45세부터 70세까지 열세번에 걸쳐 해외 스케치 여행에 나섰다. 40대 후반에 타히티에서 시작해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스페인을 여행했고, 50대에 사하라와 킬리만자로의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횡단했으며, 5년 후 다시 정열의 땅 인도와 신비의 땅 중남미 기행에 나서 아마존 밀림지대까지 누볐다. 미국과 영국 여행에서는 예술가들의 흔적을 찾아 화폭에 담았다.(극단생활 정중헌 대표)
채색 인물화와 풍물화로 대별되는 천경자 화백의 예술세계는 1969년을 기점으로 잡아 그 이전을 꽃과 여인을 주로 한 채색화 시기, 그 이후는 세계를 기행하며 스케치해서 그린 풍물화 시기로 볼 수 있다..(중략)
천경자 화백은 45세부터 70세까지 열세번에 걸쳐 해외 스케치 여행에 나섰다. 40대 후반에 타히티에서 시작해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스페인을 여행했고, 50대에 사하라와 킬리만자로의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횡단했으며, 5년 후 다시 정열의 땅 인도와 신비의 땅 중남미 기행에 나서 아마존 밀림지대까지 누볐다. 미국과 영국 여행에서는 예술가들의 흔적을 찾아 화폭에 담았다.(극단생활 정중헌 대표)
![]() |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천경자 대규모 회고전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
![]() |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서울미술관 천경자 대규모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
![]() |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서울미술관 천경자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
![]() |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천경자 대규모 회고전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
근현대에 이르러 탁월한 여성 미술가들이 앞다퉈 나오기 시작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여성 미술가들이 세계 미술계의 흐름을 그 선두에서 이끌어가고 있다. 이런 급격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성차별적인 문화와 편견이 강고했던 시기에도 온몸으로 이에 저항하며 이른바 ‘유리 천장’을 허문 위대한 선구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면 단연 천경자를 으뜸으로 떠올리게 된다.
천경자는 예술가로서, 여성으로서, 나아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평생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아름다움과 진실을 고집스럽게, 비타협적으로 그려나간 예술가다. 그것만 해도 그는 우리 문화사가 찬사를 보내야 할 위대한 업적을 쌓은 존재라할 수 있다. (평론가 이주헌 전 서울미술관장)
천경자는 예술가로서, 여성으로서, 나아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평생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아름다움과 진실을 고집스럽게, 비타협적으로 그려나간 예술가다. 그것만 해도 그는 우리 문화사가 찬사를 보내야 할 위대한 업적을 쌓은 존재라할 수 있다. (평론가 이주헌 전 서울미술관장)
전시장 벽에 걸린 대표작과 작가의 목소리, 시인과 평론가들의 평가가 어우러진 전시는 마치 천경자 삶 전체가 하나의 무대처럼 구성돼 있다.
모든 전시 공간마다 천경자와 인연이 있거나, 해당 주제를 대표할 수 있는 외부 인사가 글을 남겼다. 서울특별시 오세훈 시장,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 극단생활 정중헌 대표,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실장, 삼성출판박물관 김종규 관장, 서울미술관 초대관장을 지낸 이주헌 미술평론가 등이 참여해, 각기 다른 시선으로 천경자의 화업을 조명했다. 이들의 글은 전시를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만든다.
천경자 선생님이 1969년 신문회관에서 전시할 때 나는 소품 한 점을 갖고 싶어 좀 깎아달라고 했다가 단번에 거절당했다. 1970년 4월 4일 현대화랑을 개관하는 날 바로 그 작품, '하와이 가는 길'을 손수 보자기에 싸 오셔서 선물로 주고 가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긴 생머리에 우아하게 잘 어울리는 바바리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택시를 잡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평생 자가용 한 번 타지 않으셨다. 1990년 현대화랑 20주년 축하 글에서 “화랑이란 화가라는 태아의 탯줄이요, 태반이라며 많은 화가들을 배출해 주었으면 한다”며 나를 격려하시던 선생님이 새삼 그리워진다. (갤러리현대 회장 박명자)
긴 생머리에 우아하게 잘 어울리는 바바리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택시를 잡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평생 자가용 한 번 타지 않으셨다. 1990년 현대화랑 20주년 축하 글에서 “화랑이란 화가라는 태아의 탯줄이요, 태반이라며 많은 화가들을 배출해 주었으면 한다”며 나를 격려하시던 선생님이 새삼 그리워진다. (갤러리현대 회장 박명자)
![]() |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추모 공간 '91페이지의 기록' 천경자의 탄생과 죽음까지 기록이 담긴 공간이다. *재판매 및 DB 금지 |
![]() |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천경자 영상 *재판매 및 DB 금지 |
'내 찬란한 전설의 101페이지'라는 타이틀로 마지막 방을 장식한 공간의 영상에서 그의 육성이 울린다. “그림 그리고 죽어야 되겠어요.” 관람객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장면이다.
전시 공간마다 그림을 그리고 있고, 활짝 웃고 있는 젊은 천경자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실감케한다.
이번 특별전은 단순 회고전을 넘어 귀환의 축제를 지향한다.
11월 중순에는 ‘데일리아트’와 함께하는 '길 위의 미술관' 투어가 열린다. 천경자가 살며 작업했던 서울 서촌을 직접 걸으며, 교유했던 문인·예술가들의 흔적과 공간을 되짚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12월 6~7일에는 서울미술관에서 연극 '슬픈 전설의 화가'가 상연된다. 무대 위에서 천경자의 생애와 예술을 다시 만나게 되는 자리로, 전시와 공연이 어우러져 ‘위대한 귀환’을 기념하는 축제가 될 예정이다.
“오셔서 작품으로 거장 천경자의 일대기를 만나주십시오. 작고 10주기를 기리는 이번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가 천경자 작가의 위대한 귀환이자 찬란한 전설의 시작, 1페이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서울미술관 안병광 회장)
![]() |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1969년 처음 해외여행을 시작한 천경자가 그린 자화상다. *재판매 및 DB 금지 |
1998년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간 천경자는 2003년 뇌일혈로 쓰러져 길고 지난한 투병생활을 시작한다. 2015년 8월 6일, 한국 문화판을 뒤흔들고 호령 치던 여걸 천경자는 91페이지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모험가, 트렌드 세터, 도발적인 러브스토리, 사후까지 이어진 숱한 스캔들까지. 화려한 삶을 뒤로 천경자는 한줌의 재가 되어 생전에 사랑했던 강아지들과 산책하던 뉴욕 허드슨 강가에 뿌려진다.
모험가, 트렌드 세터, 도발적인 러브스토리, 사후까지 이어진 숱한 스캔들까지. 화려한 삶을 뒤로 천경자는 한줌의 재가 되어 생전에 사랑했던 강아지들과 산책하던 뉴욕 허드슨 강가에 뿌려진다.
사회에 저작권과 작품을 환원한 최초의 화가, 베트남전 최초의 여성 종군 작가, 1969년 마흔여섯의 나이에 전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그림을 남긴 방랑자. 그리고 맛깔나는 글을 남긴 수필가로도 기억되는 한국 채색화의 거장.
다시 보니 K-아트의 선봉이자 대장부다. 천경자가, 천경자 했다. 작품으로 보여준 이번 전시가 이를 증명한다. '천경자는 한국 미술사의 영원한 전설'이다.
전시는 2026년 1월 25일까지 열린다.
![]() |
서울미술관 천경자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
![]() |
[서울=뉴시스] 황준선 기자 = 23일 서울 종로구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언론 공개 행사에 '알라만다의 그늘'이 전시돼 있다.오는 24일부터 개최되는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는 천경자 작가의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대표 작업 80여점을 주제에 맞게 묶어 총망라한 전시로 지난 2006년 회고전 이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대형 전시다. 2025.09.23. [email protected] |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