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미시시피 강 따라 '조각 천국'…'NOMA' [이한빛의 미술관 정원]

2024.12.28

뉴올리언즈 미술관생기고 100년, 조각정원의 탄생

헨리 무어부터 서도호까지…'산책의 즐거움' 만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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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뉴올리언즈 미술관(NOMA·New Orleans Museum of Art) 정문에 설치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Five Brushstrokes’. 2013년 시드니·왈다 비스토프 부부가 리히텐슈타인 재단에서 직접 구입해 기증한 작품이다.  *재판매 및 DB 금지


[뉴올리언즈=뉴시스] 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 미시시피 강의 하류, 300여 년전부터 미국 최대 항구 중 하나로 성장해 온 뉴올리언즈 시 관광의 백미는 바로 ‘프렌치 쿼터’다. 식민시대, 프랑스령으로 개발이 시작된 이 도시엔 2~300년전의 파리 풍경이 박제된 듯 남아있다. 그곳에서 차로 10여분. 도심 한가운데 마련된 공원 부지(시티 파크)엔 자메이카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설탕 무역 사업가 아이작 델가도(Isaac Delgado, 1839-1912)가 토대를 마련한 뉴올리언즈 미술관(NOMA·New Orleans Museum of Art)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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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 NOMA 전경. 1911년 설탕 무역 사업가인 아이작 델가도의 기부로 탄생했다.
질병의 온상이었던 도시의 뒷 편(rear of the city) *재판매 및 DB 금지


1851년, 도심의 중심이 프렌치 쿼터였던 그 당시 현재 미술관이 있는 부지는 이른바 버려진 곳이었다. 미시시피강의 하류로 자연 형성된 습지였던 것. 지역지인 ‘데일리 피케이운’(Daily Picayune)은 “도시 뒤편(rear of the city)에 공원을 조성해 습지를 없애면 모기도 사라지고 폰차트레인 호수 근처의 주거 및 상업지구의 삶의 질이 올라갈 것”이라며 ‘질병의 온상’인 이곳을 개발하라는 사설을 낼 정도였다.

정말 불편했던 것인지 뉴올리언즈 시는 1858년 습지를 구매하고 1872년 공공 공원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고 1911년 아이작 델가도가 뉴올리언즈 시에 미술관을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이 공원의 가운데에 자리를 마련했다. NOMA의 시작이었다. 1911년 12월 11일, ‘아이작 델가도 미술관’으로 문을 연 MOMA는 9개 컬렉션으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약 4만여점의 작품을 소유한 대형미술관으로 거듭났다. 그리스-로마시대 도자부터 동시대 미술까지 세기를 아우르는 컬렉션을 자랑한다. 회화, 조각은 물론 프랑스, 미국 미술, 가구, 사진에 이르기까지 범위도 방대하다. 특히 1970년대 초 어머니의 가족이 살던 뉴올리언즈를 방문했던 에드가 드가가 당시 이 미술관에서 불과 20블록 떨어진 곳에서 그렸던 작품이 컬렉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미술관 생기고 100년, 조각정원의 탄생
미술관은 델가도가 초창기 요청한 것처럼 ‘기증이나 대여로 예술작품을 수집할 수 있고, 뉴올리언즈 미술협회가 수시로 전시를 개최할 수 있는’ 곳으로 성장했다. 컬렉터들의 기증과 펀드레이징을 통해 고전 건축양식을 따른 3층짜리 미술관은 수차례 증축을 이뤘고 컬렉션도 규모에 맞도록 확장했다. 그러나 NOMA가 미국내 비슷한 수준의 다른 유명 미술관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바로 ‘조각정원’이다. 11.5에이커(1만4000여평) 규모의 시드니 앤 왈다 베스토프(Sydney and Walda Besthoff) 조각정원이 그 주인공이다.

미술관 뒤 쪽, 동그란 건물에 양 날개를 펼치듯 자리잡은 이 조각 정원은 2003년 베스토프 부부의 기부와 제안으로 만들어졌다. 미시시피강 지류인 환경을 해치지 않고 최대한 활용해, 자연 속에서 조각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약국 체인인 K&B(K&B Incorporated) 회장이던 시드니 베스토프는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1977년부터 컬렉션을 시작했다. 컬렉션이 약 100여점에 달하자 이듬해 ‘시드니 앤 왈다 재단’을 시작해 꾸준히 예술 후원에 나선 것으로 유명하다. 2002년엔 ‘아트 앤 안티크’ 잡지 선정 미국 100대 수집가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정원은 2017년 대대적 확장에 나섰다. 2년간의 공사 끝에 미술관 뒤에 흐르는 두 개 운하를 연결하고 원형극장과 조각 파빌리온, 야외 학습장 등이 들어섰다. 베스토프 부부가 기증한 모던 조각품에 대해 현대미술 작품도 더해졌다. 덕분에 지금 조각 정원은 헨리무어부터 서도호에 이르기까지 백 여년의 시간을 가로지르는 작품 97점이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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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 르네 마그리트 ‘The Labors of Alexander’(1967).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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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 서도호 ‘Karma’(2011).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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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 레안드로 에를리히 ‘Window with Ladder, Too Late for Help’ (2008).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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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클라에스 올덴버그 앤 쿠스제 반 브룽겐의 ‘Corridor Pin, Blue’(사진 왼쪽)과 하우메 플렌자의 ‘Overflow’.  *재판매 및 DB 금지

◆헨리 무어부터 서도호까지
미술관 관람 뒤, 정문으로 나오면 바로 앞에 24피트 높이의 로이 리히텐슈타인 ‘파이브 브로쉬스트로크’(Five Brushstrokes)가 있다. 원형 분수 안에 자리잡은 이 작품은 2013년 베스토프 부부가 리히텐슈타인 재단에서 직접 구입해 기증한 것이다. 설치 당시 베스토프 부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관객이 미술관을 향해 다가오면, 이 풍경을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 것”이라며 “미술관 앞에 놓기 훌륭한 작품이다. 이곳에 어울릴만한 다른 작품을 생각하기 힘들다”고 밝힌 바 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미국을 대표하는 팝아트 작가의 작품은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원형 분수를 보고 오른쪽으로 돌든, 왼쪽으로 돌든 조각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왼쪽이 주 출입구 이긴 하나 정문-후문 개념보다는 동문-서문 개념에 가깝다. 정원 내 산책로는 여러 개로 갈린다. 그러나 서로 이어져 있어 길을 잃거나 할 염려는 없다. 키가 큰 나무는 넓은 간격으로, 작은 관목과 풀은 촘촘하게 심어 시야를 가리거나 막는 것도 없다. 탁트인 산책로라는 느낌이 강하다. 미시시피강 지류를 끌어들여 작은 연못이 조성됐고, 이를 둘러싸고 산책로가 이어진다.

주 입구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관객을 맞이하는 것은 헨리무어의 좌상이다. 이어 르누아르, 르네 마그리트 작품과 같은 근대 거장들의 조각이 차례로 이어진다. 일본 미니멀리즘 거장인 이사무 노구치의 작품은 연못을 내려다 보는 위치에, 한국작가인 서도호의 ‘카르마’는 산책로가 시작하는 곳에서 만날 수 있다. 걸어가는 사람의 어깨에 올라타 눈을 가리는 인물상이 수없이 반복하는 거대 조각은 2011년에 조각 정원에 합류했다. 뉴올리언즈는 허리케인 카트리나(2005년)의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이기도 하다. 이를 기억하는 작업도 있다. 레안드로 에를리히의 ‘사다리가 있는 창, 너무 늦은 도움’(Window with Ladder, Too Late for Help)은 카트리나로 폐허가 된 로어 나인 구의 공터에 2008년 처음 설치된 작업으로 이후 조각정원으로 옮겨졌다. 공중에 떠 있는 창문과 이어지는 사다리는 당시의 기억을 은유하는 듯 해 절망스럽고 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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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장 미셸 오토니엘 ‘L’Arbre aux Colliers (Tree of Necklaces)’(2002).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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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루이스 브루주아 ‘Spider’(1996).  *재판매 및 DB 금지



조금 걷다 보면 일상용품을 예상치 못한 사이즈로 크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클라에스 올덴버그 앤 쿠스제 반 브룽겐의 ‘파란 옷핀’(Corridor Pin, Blue)을 만나게 된다. 옷 핀 앞에는 좌선하는 인물상을 표현한 하우메 플렌자의 조각 앞에 놓였다. 날카로운 핀이 인물을 찌를 듯한 배치가 위트있다. 연못 가에는 엘렘그린 드라그셋의 작품이 놓였다.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해야하는데, 그 깊이를 가늠하느라 주저하는 두 소년의 모습이 관객들의 눈길을 끈다.

모성을 주제로 작업하는 루이스 브루주아의 ‘거미’는 탁 트인 잔디밭 위에 놓였다. 관람객들이 가까이 다가가 걸어다니며 감상할 수 있다. 아이들은 거미 다리 사이를 뛰어다니며 숨바꼭질을 한다. 키가 큰 오크나무엔 장 미셸 오토니엘의 구슬 작품 여섯개가 아무렇지 않게 걸려있다.

우고 론디노네의 ‘태양’도 프랑크 스텔라의 ‘별’도 주변 경관에 조용히 녹아든다. 이제는 값어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의 거장 작품이 가득 차 있지만, 이곳은 그냥 정원이기도 하다. 정장을 입고 격식을 차려야하는 특별한 공간이 아닌 청바지에, 강아지와, 혹은 가족들과 함께 산책하는 일상인 풍경이 가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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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 엘렘그린 드라그셋 ‘Maybe (Not)’. 올해 조각정원에 설치된 작품이다]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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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한빛] 프랑크 스텔라 ‘Alu Truss Star’(2016) 너머로 우고 론디노네의 ‘The sub(2018)이 보인다.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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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 출신 팝아트 밴드 People Museum이 NOMA의 베스토프 조각 정원에서 2024년 2월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에 영감을 받은 공연을 개최했다. 사진=NOMA 유튜브 캡쳐] *재판매 및 DB 금지

◆섬세한 큐레이팅 그리고 산책의 즐거움
90여개에 달하는 조각품이 쉬지 않고 펼쳐지건만 피로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섬세한 큐레이션의 한 축은 조경과 건축이 담당하고 있다. 특히 두 날개처럼 펼쳐진 공원을 잇는 반지하 산책로가 인상적이다. 이어지는 연못을 가로지르는 것은 ‘루즈벨트몰’ 도로인데, 이 아래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산책로는 이 물길을 따라 이어진다. 도로를 넘는 구름다리를 조성해 두 개 공원을 이을 수 있지만 건축가들은 하늘로 솟아오르는 대신 도로 아래로 숨는 전략을 택했다.

수면 높이만큼 벽을 만들어 물을 가두고 길을 만들었다. 아래로 낮아지는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눈 높이에서 수면을 만나는 독특한 시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평상시 수면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경우가 많은데, 같은 높이에서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시각적 환기가 된다. 느리게 흐르는 유속 덕분에 명상적이기까지 한 산책이 완성된다.

조각정원은 분명 도심 한 가운데 있지만, 간간히 지나가는 차 소리가 아니라면 이곳이 뉴올리언즈 한가운데 임을 잊기 십상이다. 그만큼 자연스럽다. 지역 자생종인 참나무, 소나무, 목련, 동백과 같은 나무들이 자리잡고 그 아래 쉴 공간이 충분하다. 구석구석 벤치가 놓였고, 잔디밭엔 자리를 깔고 눕기 좋다. 때문일까, 이곳에서는 1년 내내 이벤트가 끊이지 않는다.

공연과 영화상영 외에도 지역 커뮤니티의 이벤트도 꾸준히 열린다. 열린 공간의 매력이다. 컬렉션과 전시 외에도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이 조각정원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수잔 테일러 NOMA관장은 “조각정원의 역할은 미술관에겐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일반 대중 관객을 대상으로 그 잠재력이 엄청나다”며 “일년 내내 열리는 많은 야외 축제, 영화 상영, 콘서트와 공연이 조각 정원이라는 열린공간으로 인해 인해 더욱 향상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미술관의 역할은 늘 시대에 따라 변한다. 미술관 정원은 그에 따라 야외 조각 전시장으로, 휴식 공간으로, 동시대 미술의 실험장으로 변화해 왔다. 이제 미술관은 관객 확장과 공감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각 미술관이 처한 상황이 모두 다르지만, 정원이 있는 미술관들은 이곳을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 통로로 사용한다. 미술관이 홀로 선 기관이 아니라, 커뮤니티 안에서 그 역할이 완성되기 때문이리라. 부속물 같은 정원에 끝없이 빠져드는 이유다.
 
★그동안 [이한빛의 미술관정원]을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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