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
나치 구호도 소년들도 거꾸로…바젤리츠 마지막 그림 ‘나의 학교’[박현주 아트클럽]
2026.10.30
전후 독일 폐허 속 ‘영웅들’ 연작으로 화단에 충격
1969년부터 거꾸로 회화…관습 뒤집은 60년 예술 인생
뉴욕 가고시안서 마지막 회화 첫 공개…서울 세화미술관 회고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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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org Baselitz Meine Schule, die Jungs (My School, the Boys), 2026 Oil and gold oil paint on canvas 118 1/8 x 177 1/4 inches (300 x 450 cm) © Georg Baselitz 2026 Photo: Ulrich Ghezzi Courtesy the artist and Gagosian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소년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
황금빛 화면 위로 분홍색 인물들이 줄지어 있다. 발은 하늘을 향하고 머리는 아래로 향한다. 화면 아래쪽에는 독일어 문장이 거꾸로 적혀 있다.
‘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
‘하나의 민족, 하나의 제국, 하나의 지도자.’
나치 독일의 구호다.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게오르크 바젤리츠(1938~2026)가 생애 마지막에 완성한 회화 ‘나의 학교, 소년들(Meine Schule, die Jungs)’이다. 가로 4.5m에 이르는 대작이다.
평생 사람을 거꾸로 그린 화가는 왜 마지막에 나치 시대의 소년들을 불러냈을까.
뉴욕 가고시안 갤러리는 오는 11월 12일부터 2027년 1월 23일까지 바젤리츠 개인전 ‘마이네 슐레(Meine Schule·나의 학교)’를 개최한다. 지난 4월 30일 작가가 88세로 세상을 떠난 뒤 가고시안이 여는 첫 바젤리츠 전시다.
바젤리츠가 생전에 직접 구상한 이번 전시에서는 ‘나의 학교, 소년들’과 ‘나의 학교, 소녀들’을 처음 공개한다.
그가 마지막에 돌아간 곳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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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타데우스 로팍 서울 개관전에 참여한 게오르그 바젤리츠. 독일 스튜디오에서의 모습. 사진=타데우스 로팍 서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나치 구호가 걸렸던 학교
바젤리츠는 1938년 독일 작센주의 도이치바젤리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을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가족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 학교 건물에서 살았다. 히틀러의 생일 같은 국가 행사 때면 건물에는 나치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학교는 아이들이 글을 배우는 곳이면서 국가의 이념이 일상으로 스며드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어린 바젤리츠는 무엇을 보았을까.
그림 속 소년들은 대답하지 않는다.
분홍색 몸은 거꾸로 놓여 있고, 얼굴은 뚜렷하지 않다. 나치 구호도 뒤집혀 있다. 한때 사람들을 하나의 방향으로 몰아갔던 명령의 문장이 이제는 고개를 돌려야 읽히는 글자가 됐다.
그림은 과거의 한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기억을 불러오면서 동시에 낯설게 만든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단순한 정치적 고발로만 읽을 수는 없다.
바젤리츠는 자신의 후기 회화에 대해 문학도, 이야기도,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선언도 아니라고 말했다. 대신 “과거와 현재 사이에 잠정적으로 그어진 선에 무언가를 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그림에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 있다.
나치 시대의 학교와 2026년의 캔버스. 어린 소년의 기억과 노년 화가의 붓질이 한 화면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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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세화미술관은 12일 서울 종로구 세화미술관에서 독일 신표현주의 대표 작가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는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 39점을 포함해 바젤리츠 예술의 전모를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회화와 드로잉, 조각 등 총 46점을 선보이고 있다. 2026.08.12. [email protected] |
◆그림을 뒤집기 전에 ‘영웅’부터 뒤집었다
바젤리츠가 뒤집은 것은 그림의 방향만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은 폐허였다. 건물만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국가가 내세웠던 가치와 영웅의 이미지도 무너졌다.
전후 독일을 가리키는 ‘제로 아워(Zero Hour·Stunde Null)’.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던 시간이다.
그 시대에 바젤리츠는 ‘영웅들(Heroes)’ 연작을 그렸다.
하지만 그의 영웅은 승리자가 아니었다.
누더기를 걸치고 황폐한 땅에 서 있다. 몸은 상처 입었고, 자세는 불안하다. 기념비 위에 우뚝 선 영웅이 아니라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 홀로 남겨진 인간에 가깝다.
지난 8월 서울 세화미술관에서 만난 세계적인 갤러리스트 타데우스 로팍은 바젤리츠를 ‘거꾸로 그린 화가’라는 수식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습니다.”
로팍은 바젤리츠가 전후 독일의 ‘제로 아워’에서 새로운 미술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영웅들’ 연작을 두고 “자신이 속한 나라, 그 시대의 인간적 조건에 대한 정치적 발언”이라고 설명했다.
전쟁을 일으킨 국가에서 영웅이란 무엇인가. 패배한 사람도 영웅이 될 수 있는가.
바젤리츠는 그 질문을 그림으로 던졌다.
그림을 거꾸로 뒤집기 전에 이미 ‘영웅’이라는 관념부터 뒤집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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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세화미술관은 12일 서울 종로구 세화미술관에서 독일 신표현주의 대표 작가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 회고전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품 '프랑스에서의 엘케 II'를 선보이고 있다. 2026.08.12. [email protected] |
◆사람을 거꾸로 세우자 그림이 보였다
1969년 바젤리츠는 또 한 번 회화의 질서를 흔들었다.
이번에는 그림 속 대상을 아예 거꾸로 놓았다.
사람은 발이 위로 올라갔고, 나무는 땅을 향해 거꾸로 뻗었다.
우리는 그림을 보면 먼저 무엇이 그려졌는지 알아보려 한다. 인물의 표정을 읽고, 풍경의 장소를 찾고, 이야기를 상상한다.
그러나 사람이 거꾸로 놓이면 익숙한 읽기가 멈칫한다.
얼굴보다 선이 먼저 보인다. 인물의 정체보다 색채와 붓질이 눈에 들어온다.
바젤리츠가 거꾸로 그리기 시작한 데에는 역사적 경험도 있었다.
그는 나치 독일에서 태어나 전쟁을 겪었고, 동독에서 미술을 공부하다 1957년 서베를린으로 옮겼다. 국가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구상미술이 선전 수단으로 이용되는 현실을 경험했다.
미술사학자이자 가고시안 디렉터인 리처드 칼보코레시는 바젤리츠가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회화에 점차 환멸을 느꼈다고 설명한다.
그림을 거꾸로 놓은 것은 관객의 관심을 이야기나 의미에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로 돌리려는 시도였다.
그렇다고 완전한 추상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인물은 남겨두되, 그 인물을 익숙한 방식으로 읽을 수 없게 했다.
그는 회화의 관습을 흔들었고, 국제 미술계의 거장이 됐다. 지난해 프리즈 서울 2025에서는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가 출품한 그의 2019년 회화 ‘Es ist dunkel, es ist’가 180만 유로에 판매됐다고 갤러리 측이 밝혔다.
그러나 작품값이 아무리 높아져도 그의 그림은 관객에게 편안한 감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림을 똑바로 보기 위해 관객은 고개를 기울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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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org Baselitz Keine Frage, Euphorismus (No Question, Euphorism), 2025 Oil and gold oil paint on canvas 118 1/8 x 84 5/8 inches (300 x 215 cm) © Georg Baselitz 2026 Photo: Stefan Altenburger Courtesy the artist and Gagosian *재판매 및 DB 금지 |
◆죽기 한 달 전, 금빛 그림이 걸린 헛간
바젤리츠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이었다.
칼보코레시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근처 농가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여든여덟 살 화가의 몸은 쇠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정신은 여전히 날카롭고 탐구심이 강했다.
개조한 헛간에는 거대한 금빛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대부분 아내 엘케의 나체를 그린 작품이었다. 몇 주 전까지 그가 작업하던 그림들이었다.
늙어가는 몸을 그렸지만 화면에는 밝은 색의 물감이 두껍게 얹혀 있었다. 칼보코레시는 그 그림에서 노화와 죽음을 감상적으로 다루지 않는 태도와 억누를 수 없는 생명력을 보았다.
바젤리츠는 마지막 조각의 사진도 보여줬다.
‘스트라빈스키(Strawinsky)’(2026).
고개를 깊이 숙인 인체가 앉아 있다. 팔과 다리는 가늘고 힘없이 늘어져 있다.
이 조각은 그가 2025년 잘츠부르크 마리오네트극장의 ‘병사의 이야기’ 공연을 위해 디자인한 인형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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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org Baselitz Strawinsky (Stravinsky), 2026 (detail) Patinated bronze and enamel paint 89 3/8 x 95 3/4 x 116 1/8 inches (227 x 243 x 295 cm) Edition of 6 + 3 AP © Georg Baselitz 2026 Photo: Martin Müller, Berlin Courtesy the artist and Gagosian *재판매 및 DB 금지 |
칼보코레시는 이 작품에서 독일 조각가 빌헬름 렘브루크의 ‘앉아 있는 청년’을 떠올렸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는 두 조각이 작별의 정서를 공유한다고 해석했다.
바젤리츠의 마지막 조각은 그가 완성을 지시한 작품으로, 이번 뉴욕 전시에서 회화와 함께 공개된다.
몸은 늙어가고 있었지만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장남 다니엘 블라우는 지난 8월 서울 세화미술관에서 아버지가 “매일 그날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작업했다”고 회고했다.
◆평생 떠나지 않았던 고향의 풍경
바젤리츠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마지막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연 속에서 자랐다. 고향 주변의 참나무와 자작나무, 소나무, 과수원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미술학교에 지원하기 전에는 임학을 공부하기 위한 입학시험에 합격하기도 했다.
나무와 숲은 이후 그의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나무꾼과 개, 도끼와 통나무를 화면 곳곳에 분리해 배치한 ‘절편 회화’를 그렸다. 인물과 사물의 형태를 끊어내고 재배열한 작업은 훗날 거꾸로 회화로 이어졌다.
1975년 뉴욕에 작업실을 잠시 마련했을 때도 그는 도시의 풍경보다 어린 시절 동독의 시골 풍경을 기억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의 이미지는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에 다시 불러낸 것은 그 풍경 속에 있던 학교였다.
흥미로운 역설이다.
그림을 거꾸로 그려 대상의 이야기에 매이지 않으려 했던 화가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을 화면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기억마저 똑바로 그리지 않았다.
소년들도, 나치 구호도 거꾸로 놓았다.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과거를 다시 보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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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세화미술관은 12일 서울 종로구 세화미술관에서 독일 신표현주의 대표 작가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 회고전 기자간담회를 갖고 골드 페인팅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2026.08.12. [email protected] |
◆서울 세화미술관 금빛 전시실, 뉴욕의 마지막 학교
바젤리츠의 작품은 지금 서울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해머링맨이 앞에 서 있는 서울 광화문 세화미술관에서는 12월 27일까지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1966년 초기작부터 2026년 작품까지 회화와 조각, 드로잉 46점을 선보인다.
전시장에서는 상처 입은 인물에서 거꾸로 놓인 형상, 말년의 금빛 회화까지 한 화가의 변화가 이어진다.
전시장을 찾은 장남 다니엘 블라우는 금빛 회화가 걸린 마지막 전시실을 둘러본 뒤 “바젤리츠를 위한 채플(예배당) 같다”며 감동을 전했다.
서울의 전시가 한 화가의 60년을 돌아보는 자리라면, 뉴욕의 전시는 그가 마지막에 남긴 작품을 보여주는 자리다.
평생 그림을 거꾸로 그린 화가는 마지막에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나치 구호가 있었고, 소년들이 있었다.
전쟁은 끝났고 시대는 바뀌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소년 바젤리츠는 여든여덟 살의 화가가 되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림 속 사람들은 여전히 거꾸로 매달려 있다.
세상을 거꾸로 그렸던 화가는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을 똑바로 보고 있다고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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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세화미술관은 12일 서울 종로구 세화미술관에서 독일 신표현주의 대표 작가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 회고전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품 '빨강, 주황, 노랑의 반대'를선보이고 있다. 2026.08.12. [email protect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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