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존재는 마찰에서 생긴다…엄정순, ‘보푸라기 회화’[박현주 아트에세이 ⑰]
2026.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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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푸라기를 모아 만든 작품. 엄정순_무늬 없는 리듬 1-3, 2025, 종이에 아크릴릭, 태피스트리, 76x56cm. 학고재갤러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보푸라기는 마찰의 흔적이다.
옷감이 닳을 때 생겨나는 작은 덩어리.
정돈된 표면에서 밀려난 잔여물.
그러나 그것은 결함이 아니다.
어딘가와 맞닿았다는 증거다.
마찰이 없으면 보푸라기도 없다.
스침이 없으면 흔적도 없다.
완벽하게 매끈한 표면은
아직 아무것도 만나지 않은 상태일지도 모른다.
마찰은 관계를 만든다.
관계는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흔적은 존재를 드러낸다.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의 중심,
단단한 덩어리로 믿지만
실은 끊임없이 닳고 긁히며 생성되는
느슨한 표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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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푸라기로 만든 회화. 엄정순_무늬 없는 리듬 1-4, 2025, 종이에 아크릴릭, 태피스트리, 76x56cm. 학고재갤러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엄정순의 화면 위에서 보푸라기는 더 이상 섬유의 잔여가 아니다.
손끝으로 긁어 모으고, 떼어 붙이고, 다시 눌러 붙이는 반복 속에서
화면은 붓질이 아니라 접촉의 기록이 된다.
그 표면은 매끈하지 않다.
빛은 고르게 반사되지 않고,
미세한 돌기와 결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보는 행위는 자연스레 더듬는 감각으로 바뀐다.
이 회화는 시각이 아니라 촉각을 호출한다.
눈으로 읽기보다, 피부로 감지하게 만든다.
존재는 완결된 본질이 아니라
세계와의 접촉 속에서 조금씩 일어나는 사건이다.
엄정순의 화면 위 보푸라기는
그 사건의 잔여다.
지워지지 않은 관계의 조각.
우리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무엇과 마찰하며 살아왔는가로 설명된다.
예술은 완성을 향한 기술이 아니라
마찰을 견디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닳아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그 태도 속에서
보푸라기는 사소함을 벗는다.
작고 질긴 생명으로
존재의 가장자리에서
다시 중심이 된다.
존재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치며 생겨난다.
그리고 남겨진 보푸라기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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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푸라기로 만든 회화. 엄정순_무늬 없는 리듬 2-4,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태피스트리, 61x72. 학고재갤러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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