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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끝없는 것을 시작하는 일”…단색화 거장 정상화 별세

2026.01.28

향년 93세…한국 전위미술 1세대 흰색 그림으로 유명

‘들어내기·메꾸기 독창적 기법…단색화 확장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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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화 화백, 2023. 사진=갤러리현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단색화 거장 정상화 화백이 28일 오전 3시 4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1932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정상화는 한국 전위미술 1세대로, ‘들어내기(peeling off)와 메꾸기(filling in)’라는 독자적인 방법론을 통해 단색화의 조형 언어를 확장해 온 작가다. 캔버스를 자르고, 접고, 고령토를 바르고 말린 뒤 다시 벗겨내는 반복적 과정을 통해, 그는 평면 회화를 깊이를 지닌 공간으로 전환시켰다. 이 고도의 신체적·정신적 노동은 그의 작업을 단순한 화면이 아니라 시간과 수행의 축적으로 만들었다.

1950~60년대 앵포르멜 경향의 전위 회화로 출발한 그는 1969년 일본 고베로 이주하며 회화의 평면성과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를 시작했다. 이 시기 ‘들어내기’와 ‘메꾸기’라는 방법론을 정립했고, 1973년부터는 정상화로 대변되는 단색의 그리드 회화를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1977년 이후 프랑스로 활동 무대를 옮긴 뒤에도 급격한 형식 변화보다는 기존 화풍의 밀도와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데 전념했다.

정상화의 작업은 겉보기에는 유사해 보이지만, 어느 하나도 동일하지 않다. 같은 백색이라 해도 격자의 크기와 간격, 표면의 높낮이와 균열의 결이 모두 다르다. 화면은 작가가 축적한 노동의 시간만큼 각기 다른 표정과 리듬을 획득한다. 그는 작업에 몰입할수록 “내면은 오히려 비어간다”고 말해 왔다. 그의 회화는 결과라기보다 과정이며, 과정 자체가 작품의 의미를 형성한다.

해외 활동이 길었던 탓에 한동안 국내 미술계에서 멀어졌던 그는 1979년 진화랑 전시를 계기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갤러리현대와의 인연을 통해 국내외에서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으며, 2011년 프랑스 생테티엔 현대미술관,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미국 스미스소니언 허쉬혼 미술관, 홍콩 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구겐하임 아부다비 등에 소장돼 있다.

정상화는 생전 “예술이란 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것을 시작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완성에 도달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반복하고 갱신하는 과정 속에서, 그는 회화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의 작업은 한국 단색화가 세계 미술사 속에서 하나의 독자적 언어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30일.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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