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존재를 붙잡으려는 집념…고영훈, 시간을 그리는 회화
2025.08.21
서울 남산 하얏트 가나 남산서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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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훈, 어제오늘그리고내일-25.3, 2025, acrylic on plaster, canvas, 90 x 130cm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이 그림 앞에 서면, 늘 묻게 된다.
“이것은 실재인가, 아니면 환영인가.”
'극사실화 대가' 고영훈(73)화백이 가나아트 남산에서 개인전 '흐르는 존재들'을 연다. 지난 7월 남산 하얏트 호텔 안에 새롭게 개관한 전시장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신작 중심으로 구성돼, 고영훈이 평생 탐구해온 사실과 환영(幻影)의 경계를 다시금 환기한다.
1970년대 추상이 주류였던 한국 미술계에 사실적 회화의 충격을 던진 그는, 1986년 한국 작가 최초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되며 국제 무대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이후 수십 년간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미지를 통해 지각과 인식의 한계를 흔드는 작업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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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훈, 오늘2025acrylic on canvas53 x 45 cm *재판매 및 DB 금지 |
이번 전시는 초기 작업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소품부터, 2000년대 이후 대표 오브제인 달항아리 연작까지 망라한다.
특히 신작에서는 동일한 도자를 여러 시점에서 포착하거나 흐릿하게 겹쳐 배치해, 회화 속에서 공간감과 시간성을 동시에 구현하는 시도가 돋보인다.
사진처럼 보이지만 사실을 넘어선 초현실적 순간이 화면 위에서 펼쳐진다. 사물의 외형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본질과 시간의 흔적까지 붙잡으려는 집념이 묻어난다.
대표작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2025)은 세 개의 달항아리를 한 화면에 중첩시켜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을 포착한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온전한 달항아리’를 창조하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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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훈 무제 2025Acrylic on silk screen, old books, canvas53 x 45 cm *재판매 및 DB 금지 |
고영훈의 그림은 사물의 모사(模寫)가 아니다. 그가 평생 응시해온 것은 바로 그 간극, 현실과 환영 사이의 틈이다. 추상이 지배하던 시대에 사실적 회화라는 돌을 던졌던 젊은 시절부터,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된 국제 무대, 그리고 지금도 멈추지 않는 실험까지. 그의 화면은 늘 현실의 경계를 흔들며 새로운 시선을 요구한다.
사진 같은 그림, 그러나 흐르는 시간. 2014년 개인전 때 고영훈은 이렇게 말했다.
“젊었을 땐 재현에만 힘을 썼고 이제, 닮게 그리는 일은 관심이 없다.”
국내 극사실주의의 거장으로 불리던 그는 이미 그때 재현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했다. 눈이 침침해져 사물이 흐려 보이는 것도 “세월이 준 선물”이라 여겼고, 흐릿한 형상을 그려내며 실재와 환영의 경계를 흔들었다. 그가 말한 “환영 자체를 실재로 받아들인다”는 선언은 새로운 길을 예고하는 일종의 선언문이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서울 남산 하얏트 ‘가나 남산’에서 열린 개인전 '흐르는 존재들'은 그 선언의 완결판처럼 다가온다. 항아리와 사발, 깃털과 시계 같은 오브제들이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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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훈, 술의 노래 2025 acrylic on plaster, canvas 53 x 45 cm *재판매 및 DB 금지 |
작가는 말한다. “지금의 모습만으로는 사물의 정체성을 온전히 알 수 없다. 50년, 100년의 시간을 함께 안아야 비로소 전체가 드러난다.”
그래서 그의 화폭 속 오브제들은 단순한 정물이 아니다. 수백 년을 품은 도자기, 한 세대의 삶을 기록한 시계, 날갯짓의 순간을 얼린 깃털은 모두 ‘흐르는 존재’다. 고영훈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실체 위를 스쳐간 시간의 흔적이다.
2014년의 고영훈이 “재현을 넘어 환영을 실재로 받아들인다”고 했다면, 2025년의 고영훈은 “시간 자체를 실재로 받아들인다”로 확장했다. 구작을 재구성한 소품에서 달항아리 회화까지, 그의 집요한 질문은 하나로 수렴한다.
달항아리 표면을 타고 흐르는 빛과 그림자는 단순한 물질의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 자체의 은유다. 정지된 듯 보이지만, 실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 우리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고영훈의 회화는 ‘대상’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시간’을 그린 회화다. 존재를 붙잡으려는 집념 속에서 그는 오늘도 묻는다.
“실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전시는 9월 2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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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훈 개인전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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