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학고재 ‘흙으로부터’…김환기·송현숙·박영하·이진용·박광수·로와정·지근욱

2025.08.20

뿌리 깊은 K아트, 흙으로부터 세계로

장인정신과 수행의 미학 한 자리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학고재 갤러리는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 전관에서 그룹전 '흙으로부터(from the earth)' 기자간담회를 갖고 송현숙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시작된 이번 전시는 김환기, 송현숙, 박영하, 이진용, 박광수, 로와정, 지근욱 작가가 참여한다. 2025.08.20.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학고재가 20일 본관과 신관에서 개막한 그룹전 '흩어지고 바스라지며 단단해지는: 흙으로부터'는 단순한 테마전이 아니다.

흙을 매개로 한국미술의 근원과 정체성을 탐구하고, 이를 동시대 세계 미술의 장과 연결하는 시도다. 오는 9월 키아프·프리즈 서울 기간과 맞물려 열리는 이번 전시는, ‘뿌리 있는 K아트’를 내세우며 한국적 미감의 본질과 세계화 전략을 동시에 드러낸다.

참여 작가는 김환기, 송현숙, 박영하, 이진용, 박광수, 로와정, 지근욱 등 7명이다. 전시 기획을 맡은 신리사 팀장은 흙을 “모든 생명의 기원이자 귀환의 자리”로 설명한다. 흙은 분청과 백자, 흑자를 거쳐 한국 도자사의 미학을 형성했고, 현대작가들에게는 존재와 정체성, 노동과 수행, 생성과 소멸을 사유하게 하는 질료로 작동해왔다.

전시는 도자의 역사에서 출발한다. 분청과 백자가 보여준 비움과 충만, 흑자가 드러낸 고요와 심연의 미학은 흙이 시대마다 새롭게 호흡해온 방식을 증언한다.

김환기의 추상회화는 근대사의 상흔을 넘어 ‘흙의 기억’을 시적 언어로 승화했고, 송현숙은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흑빛 화면 속에 녹여내며 안식의 공간으로 확장했다. 박영하와 이진용은 고대와 고전의 물질과 조우해 얻은 정신적 고양을 오늘의 공간에 불러내고, MZ세대 박광수와 로와정은 대지의 휴식과 해체의 감각을 탐구한다. 1985년생으로 이번 전시의 막내인 지근욱은 중력에서 풀려난 입자가 빛으로 환원되는 연금술적 순간을 포착하며, 세대의 맨 앞과 맨 끝을 잇는 고리를 완성한다.

associate_pic
김환기 KIM Whanki, 무제 Untitled, 1960s, 코튼에 혼합 재료 Mixed media on cotton, 90.9x60.6cm *재판매 및 DB 금지


◆김환기 점과 기호, 흙 위의 우주
김환기의 ‘상징도형(Sign Series)’은 1960년대 제작된 연작으로, 모래와 시멘트를 섞은 거칠고 질박한 화면 위에 한글 자음·모음과 상형문자를 기호화해 새겼다. 화면에는 태극의 음양, 한국적 색채의 조화가 겹겹이 스며 있다. 물수제비 던지듯 반복되는 기호와 붓질은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향한 회귀이자, 태고의 감각을 불러내려는 시도로 읽힌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학고재 갤러리는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 전관에서 그룹전 '흙으로부터(from the earth)' 기자간담회를 갖고 송현숙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시작된 이번 전시는 김환기, 송현숙, 박영하, 이진용, 박광수, 로와정, 지근욱 작가가 참여한다. 2025.08.20. [email protected]

◆송현숙  흑빛 화면, 디아스포라의 안식
1970년대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건너갔던 송현숙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바탕으로 흙빛 화면을 구축했다. 항아리, 고무신, 명주실 등 한국적 소재는 검은색 배경 속에 기호처럼 부유하며, 개인적 기억을 집단적 감각으로 확장한다. 템페라 기법과 귀얄 붓을 병용한 화면은 단순한 정물화가 아니라, 고향과 가족에 대한 애도, 디아스포라의 서사를 품은 기호화된 회화다. 그는 “그리움이 아닌 영원한 안식”의 공간을 그리고 있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학고재 갤러리는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 전관에서 그룹전 '흙으로부터(from the earth)' 기자간담회를 갖고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시작된 이번 전시는 김환기, 송현숙, 박영하, 이진용, 박광수, 로와정, 지근욱 작가가 참여한다. 2025.08.20. [email protected]

◆박영하, 고대 안료와 ‘내일의 너’
박영하는 호주 원주민 미술에서 사라진 42가지 천연 안료를 복원해 작업에 사용한다. 화면 위에 두텁게 쌓인 안료는 단일 색이 아닌 시간과 기억의 층을 드러내며, 추상적 형상들은 고요히 잠들거나 꿈틀거리며 생의 리듬을 시각화한다. '내일의 너'는 특정 풍경이 아니라 존재의 바탕 자체를 표현하는 회화로, 태고의 감각을 현재적 추상으로 재맥락화한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박현주 기자 = 학고재 갤러리는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 전관에서 그룹전 '흙으로부터(from the earth)'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진용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2025.08.2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이진용, 활자, 문명의 결을 새기다
이진용은 오래된 활자를 흙과 안료로 재현하는 ‘Type’ 시리즈를 이어왔다. 반복적이고 수행적인 제작 과정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시간의 결을 몸으로 새기는 의례에 가깝다. 화면 위에 집적된 활자들은 거대한 문양을 이루며, 개인과 집단, 입자와 우주의 구조를 동시에 환기한다. 이는 극사실적 재현을 넘어, 소멸과 생성의 순환을 드러내는 추상적 실천으로 읽힌다.

associate_pic

◆박광수, 숲과 뿌리, 존재의 감내
박광수의 인물들은 자연에 흡수되거나 뿌리와 뒤엉키며, 사라지기 직전의 경계에 놓인다. 폭풍에 휩쓸리듯 땅으로 빨려 들어가면서도 허공을 응시하거나, 고요히 엎드려 있는 모습은 소멸과 평온을 동시에 품는다. 화면은 동양의 무위자연 정신과 서구 낭만주의적 표현, 동시대 만화적 색채가 공존하며, 뿌리를 통한 귀환과 존재의 감내라는 주제를 드러낸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학고재 갤러리는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 전관에서 그룹전 '흙으로부터(from the earth)' 기자간담회를 갖고 로와정 작가의 작품 'N'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시작된 이번 전시는 김환기, 송현숙, 박영하, 이진용, 박광수, 로와정, 지근욱 작가가 참여한다. 2025.08.20. [email protected]

◆로와정 - 못과 ‘0’, 쓸모없음의 의미
로와정은 설치작업 에서 못과 숫자를 통해 ‘0(null)’의 철학을 제시한다. 지탱하지 못하는 못, 연산 끝에 도출된 0은 무용함과 공허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품는 대지와도 같다. 벽에 박힌 작은 못 작업이지만 불교적 ‘공(空)’ 사상을 환기하며, 빠른 효율을 지향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는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학고재 갤러리는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 전관에서 그룹전 '흙으로부터(from the earth)'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지근욱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시작된 이번 전시는 김환기, 송현숙, 박영하, 이진용, 박광수, 로와정, 지근욱 작가가 참여한다. 2025.08.20. [email protected]

◆지근욱, 선과 파동, 우주의 연금술
지근욱은 색연필로 선을 무수히 긋는 수행적 행위를 통해 우주의 리듬을 그린다. ‘Space Engine’ 연작에서는 은색과 금색의 광물적 색채가 더해져, 입자가 흙에서 빛으로 환원되는 순간이 포착된다. 반복과 축적이 만들어낸 화면은 물질과 파동, 대지와 대기의 경계에서 우주적 진동을 감각하게 한다. 대지에서 우주로, 고체에서 파동으로, 유한에서 무한으로 확장되는 전환의 과정은 동시대 한국미술이 지닌 정신적 지평을 새삼 확인시킨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학고재 갤러리는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 전관에서 그룹전 '흙으로부터(from the earth)' 기자간담회를 갖고 '분청사 초엽문 편병'과 박영하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시작된 이번 전시는 김환기, 송현숙, 박영하, 이진용, 박광수, 로와정, 지근욱 작가가 참여한다. 2025.08.20. [email protected]


참여 작가들의 공통점은 모두 노동집약적이고 장인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는 점이다. 흙을 빚고, 안료를 쌓고, 선을 긋고, 활자를 새기는 모든 과정은 단순한 제작이 아니라 시간을 축적하는 수행이며, 동시에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다. 이는 속도의 논리가 지배하는 오늘의 시대에 한국미술이 내세울 수 있는 중요한 미학적 자산이다.

특히 프리즈 서울 기간에 맞춰 기획된 이번 전시는 한국미술의 세계화 전략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학고재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성은 민속적 장식이나 지역적 특수성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 질료와 수행적 감각 속에서 드러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다시 말해, 뿌리 깊은 전통성 위에서 이루어지는 동시대적 확장이야말로 한국미술이 세계와 대화하는 방법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전시는 9월 13일까지.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학고재 갤러리는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 전관에서 그룹전 '흙으로부터(from the earth)'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품 '표형문자입주병'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시작된 이번 전시는 김환기, 송현숙, 박영하, 이진용, 박광수, 로와정, 지근욱 작가가 참여한다. 2025.08.20. [email protected]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관련기사 보기

구운몽 목판본 300주년…국립한국문학관 '꿈으로 지은 집' 전시

BTS 아냐, 벌집이다…도형태 ‘하이브 아트페어’ 출범

9월 ‘대한민국미술축제’…국립현대미술관, 4개관 무료 개방

리움미술관 아이디어 뮤지엄…'블랙 퀀텀 퓨처리즘: 타임 존 프로토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