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소식

정연두, 밀가루로 우주를 만들다 [박현주 아트클럽]

2025.04.25

국제갤러리서 17년만의 개인전

부산점서 25일 개막…공연장 같은 연출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연주 없는 무대에서 흐르는 삶의 리듬

'색즉시공 공즉시색' 같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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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제갤러리는 25일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정연두의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기자간담회를 갖고 주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5.04.25. [email protected]


[부산=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실재하지 않는 연주, 만져지지 않는 사운드. 정연두는 공기로 세계를 조율한다.'

무대가 있다. 연주자도 있다. 관객도 있다. 하지만 공연은 없다.

전시장에 펼쳐진 것은 실제 공연처럼 보이지만, 모두 사전에 녹화된 영상이다.

정연두의 신작은 벽에 박힌 영상 속 연주자들을 통해 실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세계를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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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제갤러리는 25일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정연두의 개인전 . 2025.04.25.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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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미술전문기자] 정연두 개인전 입구. 마치 진짜 연주하는 것 같은 영상 작품이다. *재판매 및 DB 금지 *재판매 및 DB 금지


25일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개막한 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은 영상, 사진, 조각, 퍼포먼스를 넘나드는 신작으로, 작가 특유의 다정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국제갤러리에서 2008년 이후 처음 열리는 개인전이다. 블루스와 발효, 음악과 이미지로 익숙한 질서와 논리를 넘어, 설명할 수 없는 세계와 조우하려는 시도를 펼친다.

전시는 블루스 음악을 연주하는 여섯 명의 뮤지션이 각기 다른 조명과 배경 속에서 몰입한 채 연주하는 다채널 영상 설치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마주 보지 않고, 함께 연주하지 않지만, 각자의 리듬으로 하나의 합주를 이룬다.

작곡가 레이 설(Ray Soul)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12마디 블루스 구조를 차용한 이 연주에는 단 두 가지 약속만 주어진다. 67bpm의 느린 템포와 간단한 코드. 작가는 연주자들의 자유로운 해석을 모아 비동시적 협주로 재구성한다. 그 사운드는 곧 불가피한 현실을 살아가는 개별 존재들의 리드미컬한 몸짓으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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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공연장 같은 정연두 개인전 전시 전경. 2025.04.2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전시장에 들어서면 블루스의 리듬을 따라 다섯 개의 장면이 펼쳐진다.

첫 장면에서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의 손끝에 맞춰 빛을 발하는 항아리를 마주하게 된다.

'아픈 손가락’이라는 이 작품은 아름다운 음악 뒤편에 숨은 고통을 시각화하며, 항아리 내부에는 만화경처럼 색색의 빛이 일렁인다.

벽에 걸린 러시아어 텍스트는 한국에 정착한 고려인의 사연에서 비롯된 노래다.

“BTS, 블랙핑크는 나의 사랑. 하지만 한국 여자가 되는 건, 안타깝게도 나에겐 불가능해.”

작가는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인터뷰하고, 그 사연을 가사로 바꿔 블루스 멜로디 위에 실었다.
이 이야기는 인도네시아산 바틱(Batik) 천 위에 손으로 쓴 글귀로 번역되고, 치자·강황·자초 등 천연 염료로 염색된 천 위에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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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제갤러리는 25일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정연두의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가의 작품 '아픈 손가락'을 선보이고 있다.  2025.04.25.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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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제갤러리는 25일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정연두의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가의 작품 '피치 못할 사정들 #5'를 선보였다. 2025.04.25. [email protected]


전시장은 음악뿐 아니라 발효의 리듬으로도 구성된다.

막걸리의 기포가 터지는 박자에 드럼이 울리고, 사워도우 반죽이 부푸는 리듬에 맞춰 색소폰이 숨을 쉰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우주’처럼 보이는 사진 이미지다.

검은 대리석 위에 밀가루를 흩뿌려 만든 이 장면은 마치 은하계의 탄생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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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은하수 처럼 보이지만 밀가루가 흩뿌려지는 장면이다. 정연두_은하수. 2025. Color inkjet pigment print, framed 93 x 140 x 5 cm (frame)80 x 127 cm (image)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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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두 〈은하수〉 2025 Color inkjet pigment print, framed 94 x 141 x 5 cm (framed)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재판매 및 DB 금지


오르간과 퍼커션 연주자가 음악에 맞춰 밀가루를 뿌리고, 영상 속에서는 그 가루가 빛을 받아 별처럼 떠다닌다.
소망하듯 두 손을 비비고 박수를 치며 만들어낸 장대한 우주는, 실은 빵을 만들기 위한 밀가루라는 점에서 정연두 특유의 가벼움과 무거움, 장난기와 엄숙함이 교차하는 역설의 미학을 보여준다.

가벼운 밀가루가 그려낸 장엄한 우주는, 전시장 전체에 깔린 역설의 정수이자 ‘가볍고도 무거운 삶’을 함축하는 시적 장면이다.

작가는 메주를 담그는 대신, 그 위에 사람의 기억과 시간을 띄운다.

사진 연작 '바실러스 초상'은 메주 속 바실러스균이 피워낸 하얀 거품을 클로즈업해, 마치 사람의 초상처럼 보여주는 작업이다. 관람객들 사이에서는 “메주의 재발견”이라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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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뉴시스] 박진희 기자 = 국제갤러리는 25일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정연두의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가의 작품 '바실러스 초상'을 선보이고 있다. 2025.04.25. [email protected]


보이지 않는 균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품고 있는 감정의 박테리아와도 닮았다. 우주와 블루스와 메주균을 연결하는 장면은 우주의 질서를 되묻는 ‘치유의 리듬’처럼 다가온다.

조용히 스며들고, 시간 속에서 발효되며, 결국 삶의 일부가 되는 존재. 정연두는 이번 전시에서 그 발효의 과정을 통해 신의 리듬에 가까운 삶의 움직임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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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뉴시스] 박진희 기자 = 정연두 작가가 25일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기자간담회 참석하여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2025.04.25. [email protected]


작가에게 이번 작품에 어떤 메시지가 관통하느냐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는 방식. 논리보다 믿음, 치유보다 리듬.”
전시는 종교적 경계와 감각의 흐름까지 건드린다.

작품 곳곳에서 불교 경전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어 있음의 충만함, 닿을 수 없는 감정의 밀도.

이 전시는, 설명할 수 없어도 끝내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모두의 ‘피치 못할’ 풍경을 조용히 응시한다.  전시는 7월 20일까지. 관람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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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뉴시스] 박진희 기자 = 정연두 작가가 25일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기자간담회 참석하여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2025.04.25. [email protected]

◆정연두 작가는?
1969년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조소과 졸업, 골드 스미스 칼리지 미술 석사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이다. 작가는 퍼포먼스가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사진, 영상, 설치 등 미디어 작업에 주력해 왔다. 주로 현대인의 일상에서 작업의 소재를 발견하고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에 주목하며 그로부터 파생되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국립현대미술관 ‘2007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 국립현대미술관(2023), 울산시립미술관(2022), 미국 웨스트 팜 비치 노턴 미술관(2017), 아트선재센터(2017), 프랑스 비트리 쉬르 센 맥발 미술관(MAC VAL)(2015), 일본 아트 타워 미토(2014), 플라토 미술관(2014), 중국 상하이 K11 아트 스페이스(2013), 미국 뉴욕 PERFORMA 09(2009) 등이 있다. 2025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2024년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30주년 기념전, 2021년 광주비엔날레, 2016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등에 참여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도쿄도현대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시애틀 미술관, 맥발미술관 등에 작가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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