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
반가사유상과 불이(不二)…이종구가 건너간 세계 [박현주 아트클럽]
2026.05.20
학고재서 8년 만의 개인전 ‘사유’
팬데믹과 위암 수술 이후 찾아온 변화
‘무무명’과 생로병사, 노동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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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민중미술 1세대 작가 이종구가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개인전 '사유 : 思惟'전시에서 포즈를 취했다. 2026.05.20. [email protected] |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예전 같았으면 그걸 그렸죠. 그런데 이미 넘어섰고.”
화가 이종구(72)는 잠시 말을 멈췄다. 윤석열 정부 시기 갈등과 계엄 논란, 팔레스타인 전쟁 같은 현실을 말하던 순간이었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한복판에서 농민과 노동, 시대의 폭력을 그려온 작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싸움을 그리던 화가는 이제 ‘왜 인간은 끝없이 싸우는가’를 묻고 있다.
서울 삼청동 학고재에서 20일 개막한 개인전 ‘사유(Pensive): 思惟’는 바로 그 질문 위에 서 있다. 사회적 리얼리즘이 자기 내부의 ‘자아적 리얼리즘’으로 이동한 풍경이다.
전시장에는 반가사유상 18점과 인간의 몸이 함께 등장한다. 불꽃과 촛불, 병든 육체와 전쟁의 폐허, 천년 은행나무와 진돗개까지 서로 다른 존재들이 검은 화면 위에서 마주 앉아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를 “불이(不二)의 세계”라고 설명했다.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닙니다. 일부러 캔버스를 두 개씩 붙였어요. 둘이 붙어서 하나가 되고, 또 하나가 둘이 되기도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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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고재 이종구 사유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
이번 전시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붙드는 것은 반가사유상 옆에 놓인 누드의 인간 형상이다. 그러나 이 누드는 관능이나 에로스와는 거리가 멀다.
“옷을 벗기면 신분도 계급도 없어지잖아요. 원래는 늙은 할머니 몸을 그리고 싶었어요. 생로병사가 몸에 그대로 새겨진 사람. 그런데 3년 동안 찾았는데 아무도 안 하시더라고요.”
그는 실제로 시골의 고모를 모델로 생각했다. 농사만 짓다 몸의 기름기가 다 빠져버린 노인의 육체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가족들의 반대로 끝내 무산됐다. 결국 전문 누드 모델의 몸을 빌렸지만,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젊음의 육체가 아니라 시간과 병, 노동과 늙음이 새겨진 인간 존재 자체였다.
그 변화의 배경에는 코로나 팬데믹과 위암 수술이 있었다.
“밖의 현실이 안의 현실로 들어온 거죠.”
팬데믹 시기 사회적 단절을 겪었고, 이후 위암 수술로 위 일부를 절제했다. 몸무게는 20kg 가까이 줄었다. 병원복을 입고 링거 거치대를 든 자화상이 등장하는 이유다. 건강한 불상과 병든 육체가 한 화면에 병치되며, 초월과 현실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상태임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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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구, 사유_생로병사2, 2024,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x130cm *재판매 및 DB 금지 |
전시 제목인 ‘사유’ 역시 단순한 명상이나 종교적 사색과는 다르다. 학고재는 이를 “삶을 성찰하고 치유하는 구도적 리얼리즘”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이종구는 이번 전시가 불교 포교를 위한 그림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가 끌어온 반가사유상은 법당의 신앙 대상이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서 마주한 공공의 미학적 존재다.
“우리 전통미술은 결국 다 불교미술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예배 대상으로 가져온 게 아니에요. 반가사유상이라는 존재의 태도, 사유의 자세를 본 거죠.”
그래서 이번 전시의 불상들은 현실과 충돌한다. 팔레스타인의 폐허 앞에 놓이고, 불꽃과 병든 몸, 촛불과 강물 사이에 등장한다. 작가는 “반가사유의 정신은 이런 세상을 지향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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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개인전 '사유 : 思惟'전을 연 민중미술 1세대 작가 이종구. 2026.05.20. [email protected] |
특히 불꽃은 상징적이다. 화면을 가득 메운 화염은 한편으로는 번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광배(光背)다. 민중미술 시절 그리던 분노의 불길은 이제 번뇌를 태우고 지혜를 밝히는 불교적 빛으로 변환된다. 세속의 비극적인 화염이 곧 깨달음의 서광으로 변모하는 역설적 공간이다.
이번 작업은 민중미술 이후 이종구 회화의 변화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초기 작업이 농민과 농촌, 사회 구조의 모순을 집요하게 기록한 사회적 리얼리즘이었다면, 최근 작업은 존재론적 질문으로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현실비판을 버린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직접 그렸겠죠. 그런데 지금은 싸움도 넘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말처럼 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무무명(無無明)’이라는 개념이 놓여 있다. 불교에서 무명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집착을 뜻하지만, 작가는 “번뇌와 깨달음조차 분별하면 안 된다”고 했다. 양극화와 전쟁, 혐오와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둘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종구가 여전히 자신을 노동의 감각 안에서 이해한다는 점이다.
“그림은 노동이에요.”
농부였던 아버지를 보며 자란 그는 젊은 시절 소를 키우는 노동과 그림값을 비교하며 죄책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극사실 회화조차 기술 과시가 아니라 몸의 노동으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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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구 무무명 *재판매 및 DB 금지 |
그의 화면에는 손으로 밀어 올린 시간의 밀도와 육체의 감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반가사유상의 청동 질감과 녹의 표면, 금속의 차가운 광택까지 그림이 아니라 실물처럼 다가오는 이유다. 노동집약적으로 밀어붙인 붓질은 사진보다 더 깊은 리얼리즘의 감각을 만든다.
오히려 가장 힘들었던 건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금빛 화면이었다고 했다.
“평생 뭔가를 그려왔는데, 비어 있는 화면을 만든다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그 고백은 상징적이다. 현실의 싸움을 빼곡히 기록해온 화가가 이제 비어 있음과 침묵, 사유의 상태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현실주의의 계보를 이어온 이종구의 회화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문제로 확장되며 생로병사와 생명의 근원을 향한다. 초기 작업이 시대적 모순을 고발하는 집요한 기록이었다면, 최근 작업은 생명의 본질을 향한 깊은 질문으로 그 무게중심을 옮겼다.
그는 반가사유상을 그리며 ‘깨달음’보다 오히려 끝없는 질문의 상태에 가까워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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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민중미술 1세대 작가 이종구가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개인전 '사유 : 思惟'전을 열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05.20. [email protected] |
충남 서산 출생인 이종구는 농민의 아들로 자라며 농촌 현실과 민중의 삶을 집요하게 그려온 대표적 민중미술 작가다. 정부미 쌀포대 위에 농민의 얼굴을 그려 넣은 작업으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산업화의 그늘을 드러내며 ‘농민 화가’로 불렸다. 그러나 최근 그의 시선은 비판을 넘어 생태와 생명성, 인간 존재의 존엄을 향해 확장되고 있다.
인간과 대지, 생산과 소멸, 삶과 죽음의 순환 고리를 사유하는 그의 작업은 생명의 존엄이 경시되는 현대 사회를 향한 또 다른 형태의 성찰이다.
평생 현실의 싸움을 그려온 화가는 이제 말한다.
“번뇌와 깨달음조차 분별하면 안 된다”고.
전시장 한쪽, 검은 화면 속 반가사유상은 오래된 미소로 침묵하고 있었다. 수학여행 온 아이들이 만지고 갔다는 발끝의 손때처럼, 그 앞에는 시대를 지나온 인간의 체온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 고통과 평화가 둘로 나뉘지 않는다는 불교의 ‘불이(不二)’ 사상을 회화로 풀어낸 그는 이제 광장의 촛불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어둠을 비추는 작은 불빛 앞에 앉아 있다.
“둘이 아닙니다.”
그 말은 불교의 교리라기보다, 끝없이 갈라진 시대를 건너온 한 늙은 화가의 조용한 기도처럼 들렸다. 전시는 6월 20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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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구, 불이(不二)_무무명,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x130cm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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